이순신장군은 1545년(인종1) 지금 서울의 을지로 3가에서 태어났다. 그런 관계로 이 일대를 충무로라고 부른다. 어려서 전쟁놀이를 좋아했으며, 친구들 중에서 늘 장수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세 살 많은 유성룡과 잘 어울렸는데, 징비록에서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글쓰기를 잘했다고 회고한다.
그 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수군을 지휘하여 23전 23승이라는 세계 전쟁 역사상 유일무이한 신화를 만들고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와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라는 말을 후손에게 남겼다고 한다.
영국해군의 넬슨 제독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바다의 장수는 조선의 이순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장군의 묘는 충청도 아산에 있다. 처음에는 전쟁 중에 전사했기에 임시로 남해 관음포에 묘를 썼으나, 몇달 뒤인 1599년 2월 자신이 살던 아산 음봉면으로 이장한다.
당시 묘터는 명나라 풍수사 두사충이 정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는 이여송과 진린의 풍수참모로 참전하면서 이순신과 친교를 맺었으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지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시가 전해질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 했고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 아래에서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두사충이 잡아주었다는 음봉면 금성산 자락에는 현재 장군의 후손들 묘가 많이 있다.
두사충이 최초에 잡아준 장소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지형은 동향이며, 조망이 좋은 곳이다.
다만 묘역 앞으로 흐르는 음봉천이 속수무책 빠져나가는 것이 빤히 보인다.
이는 묘역의 우측 산세가 허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의 조건을 이루지 못했다. 아마도 이점이 우려되어서 이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보면 두사충의 풍수안목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구 대명동에 있는 두사충 자신의 묘도 마찬가지인데, 풍수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곳이다.
장군 묘는 이곳에서 15년 동안 있다가 1614년 1km 떨어진 아라산(123m) 아래로 이장한다.
당시 이의신이 묘터를 정해주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의신은 교하천도론을 주장한 인물로 그 당시 왕실의 지관으로 활동했으며, 윤선도 묘를 정해주기도 했다.
정남향의 묘는 부인과 합장된 상태며 소박한 모습이다. 묘소 앞에는 네모난 형태의 작은 연못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곳이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 이순신 장군 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지형지세가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청룡 백호가 앞으로 나란히 하듯 벌어진 상태다. 청룡·백호의 역할은 바람이 치는 것을 막고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지만, 이곳은 긴 골짜기가 되어 골바람이 묘를 향해 치고 물은 직수로 빠져나가는 최악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물이 직수로 빠지는 것이 꺼림칙해 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다고 바람까지 막을 수는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화가 날 정도다.
지난 400년간 아무도 묘터의 불리함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심할 정도다.
우리의 풍수가 고작 이정도였던가?
장군의 묘는 매우 불편한 곳일 뿐 아니라 장군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현재의 장소에 잠시도 있을 이유가 없으므로 장군의 묘를 당장 옮길 것을 주장한다.
장소는 현충사 내로 하면 된다. 방화산(167m) 밑에 자리한 현충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살던 옛집이 있고 아들(이면) 묘도 있다.
전체적인 지형이 남향이면서 산이 둘러주어 아늑한 곳이다.
이곳 어느 곳에 묘를 써도 지금의 묘터보다 백배 천배 나은 곳이다.
현재의 묘는 현충사와 분리되어 일반인들 접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장군 묘는 늘 쓸쓸한 곳이다.
하지만 현충사로 이장하면 많은 사람의 향화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향집과 가까운 곳이니 장군의 혼백이 훨씬 편안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장에 대해 하등 고민할 이유가 없다.
우리 민족 불세출의 영웅을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은 후손 뿐 아니라 국민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장군의 묘를 당장 옮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