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는 영암 출신으로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옥룡자로 불렸으며, 72세에 광양 옥룡사에서 입적한다. 그의 사후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왕사로 대우하면서 국사로 불리었다.
도선국사는 승려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풍수의 대가로 더욱 알려져 있다. 특히 부족한 땅을 보완해서 사용하는 비보풍수에 능한 것으로 전해진다.
◉훈요십조
모든 사원은 도선이 자연의 이치를 보고 정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정한 사찰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땅의 기운을 훼손하여 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이는 무분별한 사원의 난립을 억제하겠다는 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산천의 훼손을 걱정하고 있다.
◉도선국사 비문(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
지리산인이 도선에게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으로서 모래를 쌓아 산천순역의 형세를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대사가 환하게 깨달아 음양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크게 깨우쳤다.
대사가 전한 음양설은 세상에 많이 있어 후일 지리를 말하는 자들은 모두 대사를 근본으로 하였다.
◉고려사
대사가 개성의 어느 집 앞을 지나다 말하기를 ‘이 땅은 의당 왕이 태어날 땅인데, 이 집을 짓는 사람만 알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마침 하인이 이 말을 듣고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 황급히 나가 영접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고쳐 짓게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 왕융이 개성에 집을 지을 때, 대사께서 집을 고치도록 말하는 대목인데, 과연 1년 후에 왕건이 출생하였다. 고려사에는 이 대목을 좀 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땅의 맥은 백두산에서부터 뻗어와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하십시오.“
그때가 876년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대로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달에 왕융의 부인(위숙왕후)이 임신하여 태조를 낳았다.
◉ 굉연의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
굉연(宏演)은 고려말 승려로서 나옹선사(1320-1376) 제자이며 무학대사(1327-1405)와 함께 수행한 승려다. 그가 지은 ‘고려국사도선전’에 보면 당나라 일행선사가 도선에게 고려의 지도를 그리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약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 곧장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역시 그러하니 이제 내가 점을 찍은 곳에 절을 짓거나 불상을 세우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도를 세우면 이것은 사람이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름하여 비보라 한다. 어찌 병이 낳지 않겠는가.
땅을 고쳐 쓰는 비보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 좌측 : 동진대사, 우측 : 도선국사
전남 광양군 옥룡면 추산리 백계산 옥룡사에는 오래된 비석 2개와 석탑 2개가 있어 비석거리로 불리었다. 자료에 의하면 도선국사(827-898) 부도탑과 그의 제자 통진대사(869-948) 부도탑이었다고 전한다.
玉龍寺先覺國師 證聖慧燈塔碑 高麗 毅宗4年(1150) 崔惟淸 撰
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 高麗 光宗9年(958) 金廷彦 撰
마을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도선국사의 비가 1910년대까지도 있었으나 그 후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한다. 또 일본의 역사학자 ‘오가와 케이끼찌(小川敬吉)’가 1931년 조사한 『조선의 건축』에는 도선의 비는 자취를 감추고 통진대사 비는 파괴되어 넘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선국사와 통진대사 부도탑은 비석거리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997년 비석거리라 불리는 그곳에서 순천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비석과 탑은 사라졌지만, 두 개의 비와 탑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사라진 부도탑 밑에서 도선국사로 추정된다는 천년 전 유골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유골은 육탈된 뼈만 가지런히 추려 석관 속에 담긴 형태였다. 즉 망자의 시신이 육탈 된 후, 유골만 추려 장사지내는 방법으로 2차장 또는 세골장이라 한다. 다만 유골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서 도선국사 유골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골이 물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풍수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 묘지 속에 물이 나거나 차는 것인데, 풍수의 비조로 추앙받는 도선국사께서 물에 잠겨 있는 상황은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순천대 발굴조사팀의 기록을 보면 석관에 물이 찰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유골이 발견된 지점의 표층조사를 보면 애초부터 매우 크게 광을 조성했으며, 또 측면은 계단식으로 파고 들어감을 볼 수 있다. 땅은 한번 파게 되면 생토(生土)에 비해 밀도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빗물의 침투가 따르게 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회다짐을 철저하게 하거나 혹은 왕릉처럼 봉분을 크고 넓게 해서 빗물의 유입을 차단해야 했는데, 작은 부도 탑만으로는 빗물의 침투를 방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도선국사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온 대중들이 목 놓아 슬피 울고 사모함이 넋이 나간 듯하였으며, 마침내 앉아 열반하신 것을 옮겨 절의 북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비문 속 절은 도선국사가 입적할 당시 있던 옥룡사를 말하는 것이고 열반한 상태를 옮겨 매장한 후 그 위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발견된 석관 속 유골은 뼈만 간추린 것으로 비문의 내용과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또 현재의 옥룡사지에서 보면 발견된 부도탑은 동쪽이기 때문에 비문에서 말하는 북쪽과는 방향이 다른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그 후에 도선국사 부도 탑을 새로 조성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기록과 다를 수 있다.
한편 동진대사 비문에는 대사가 옥룡사에서 입적하자 임시로 가매장했다가 2년 뒤 육탈된 유골만 간추려 다시 석곽을 조성하고 부도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즉 1997년 발견된 가지런한 유골의 상태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진대사 유골일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것이 되었건 이곳에서 두 개의 유골이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하나는 감쪽같이 없어진 상태다.
사라진 부도와 비가 파괴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도굴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 때 전국각지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부도 탑 약탈이 극심했기 때문에 神僧으로 불렸던 도선국사 부도 또한 도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부도탑과 유해를 옮겼다면 두 분의 고승 중 이름난 도선국사 것을 탐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간추리면 1910년대까지 옥룡사 인근 비석거리에는 도선국사의 부도 탑을 비롯해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 이는 조선 초(1478, 東文選) 기록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인 역사학자 오가와 케이끼찌가 조사할 때에는 도선국사 비는 자취를 감추고 동진대사 비는 파괴되어 넘어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97년 그곳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동진대사 비석 일부가 발견되었으나 도선국사 비석은 발견되지 않아 일본인 오가와 케이끼찌 기록과 일치한다.
두 개의 부도 탑이 있던 곳을 발굴했으나 한곳에서는 석관까지 온전하게 발굴되었고 다른 한곳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발견된 유해는 누구이고 사라진 것은 누구인가?
필자의 어리석은 추론인지 모르지만, 도선국사 부도탑과 비석, 그리고 유해는 일본의 어느 곳에 숨겨져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점은 역사학자들의 추적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