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우리나라 풍수계에는 걸출한 풍수인 3명이 출현해 선풍적인 붐을 조성했다.
손석우, 장용득, 지창룡 세명을 말하는데,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후학들이 현재 우리나라 풍수계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손석우는 그의 책 『터』에서 김일성 죽음을 예언하면서 풍수의 붐을 조성하였고 김대중 대통령후보 선영을 하의도에서 용인으로 이장 후 대통령에 오르자 더욱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는 책에서 전주 모악산에 있는 전주김씨 중시조 김태서 묘의 영향을 받은 김일성은 49년간 절대 권력을 행사하다가 1994년 겨울에 운명이 다한다고 예언했다. 그런데 실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죽자 그의 책 『터』는 70만부가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된다. 이는 풍수 관련 책으로는 최고의 판매 부수이다.
장용득은 어려운 풍수이론을 쉽고 간결하게 풀이하여 대중적 강의를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정·재계 유력자들의 풍수 자문역할을 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 중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 이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창룡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동작동국립묘지와 대전국립묘지 등을 선정했으며, 대전정부청사를 옮기는데도 참여하였다. 그 밖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묘 터를 정하였고 1970년대 한강개발사업에도 관여하는 등 주로 굵직한 풍수를 하였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면서 풍수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각각 추구하는 풍수의 방법 및 이론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었다.
손석우는 독특한 외모와 특유의 언변을 바탕으로 신비적 연출을 했으며, 장용득은 현장에서 길흉화복 추리에 뛰어난 감각을 보이면서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지창룡은 관상과 역학의 안목을 풍수에 접목하면서 국풍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들 3인으로 인해 1950∼2000년까지는 풍수의 르네상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높던 시기였다.
손석우 묘는 가야산 남연군 묘 위쪽에 자리했다. 그의 묘가 들어서기 전에는 정·재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답사했는데, 조건이 맞으면 자신들 선영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필자도 당시 모 정치인과 함께 가본 적 있으나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전통풍수이론에 크게 배치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손석우는 그곳을 자미원 혈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미원은 어떤 곳인가?
유일무이한 대 명당 터로서 72억의 인구를 다스리는 대제왕지지(大帝王之地)이다. 자미원은 충남 내포에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천장지비의 이 자리는 오로지 육관만이 안다. 신안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혈을 찾을 수 없게끔 하늘이 교묘히 감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육관은 오래전에 그 터를 찾아 표시를 해 두었다.“
하지만 가야산 묘 터에 대한 매수자가 없자 1999년 손석우 자신의 묘 자리가 된다. 당시 그곳은 도립공원이어서 묘를 쓰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서 죽어서도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다.
장용득은 경북 영양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부친이 37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게 된다. 그리고 부친 사망 이후 느닷없이 집에 불이 나 전소하고 6명의 가족이 연이어 죽으면서 부농의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된다. 계속되는 우환에 그의 모친은 장용득에게 집에 있으면 변을 당할 것 같으니 집을 피해 나가 있으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친 묘를 잘못 써서 그런 것 같으니 지관에게 조언을 받아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면서부터 풍수에 입문하게 된다.
그 후 전국각지를 다니며 번창한 가문과 쇠락한 가문의 선영을 둘러보면서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지 추적하면서 실무에 능통하게 된다. 특히 묘지 감정에 뛰어났는데, 한 가지 소개해 보겠다.
김재규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있을 때 자신의 선친이 작고하자 구미에 있는 선영을 장용득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그리하여 구미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광중을 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장용득이 보기에 묘 터가 매우 좋지 못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 터는 장남이 3∼4년 내에 큰 화를 당할 수 있으니 이곳에 묘를 쓰지 마십시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보고를 받은 김재규는 그대로 작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한다. 이때가 1975년 무렵이다. 그 후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인해 화를 당하는데, 결과적으로 장용득 예측이 정확하게 맞은 것이다. 그 후 장용득은 김재규와 접촉이 있었다는 이유로 보안사 조사를 받기도 했다.
장용득 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었다. 그곳은 장용득의 부모 묘가 있던 곳이지만, 어느 시점 부모 묘를 고향으로 이장하고 비어있던 곳을 자신의 묘 자리로 삼은 것이다. 장용득은 이장할 때 황골 나온 묘 터를 선호했는데, 황골이 나온 곳은 명당이라는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곳 역시 황골 나온 곳이었기에 각별히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장용득 묘는 영양 일월산 아래로 다시 이장하면서 현재 그곳은 터만 남아있는 상태다.
지창룡은 경기도 시흥 군자산 아래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일본으로 가서 공업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학업을 계속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역술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서예와 그림 등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술을 즐겨해 제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최초 아호는 군자산인이었다. 그러나 알고 지내던 한약방 주인이 청오(靑奧)로 바꿀 것을 권유하였다.
“선생은 연못에 든 용이오. 큰 용이 고작 작은 연못에 들었으니 힘을 제대로 쓰겠소.
연못일 바에야 이왕이면 시퍼렇게 깊은 못이 좋지 않겠소?
그래서 청오라 지은 것이오. 부디 큰 뜻을 이루어서 승천하기를 바라오."
그의 성이 지씨이고 이름이 창룡(昌龍)인데서 착안한 아호였는데, 그날부터 그는 청오선생으로 불리게 된다.
청오란 깊고 푸른 연못에 있는 용이라는 심오한 의미가 담겼다.
그의 묘는 연천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헬기를 타고 지나다 그 터를 찾았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그곳 또한 군자산으로 고향 시흥의 산 이름과 같았다. 아마도 그런 점도 터를 정하는데 친숙했을 것이다.
다음은 그의 책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 실린 대목이다.
“연천의 땅은 야자형(也字形) 길지였다. 하늘천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의 끝자가 야자였다. 문장이 끝날 때면 곧잘 쓰이는 글자로 예로부터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는 명당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내가 잡은 이 자리가 명당인지 아닌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나는 명당이라고 생각해서 기쁘게 잡았지만, 아무래도 풍수가 제 명당 못 잡는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과 솔직함은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데, 후학들은 본받을 필요가 있다.
이상 풍수계 3인의 약력을 소개해 보았는데, 가히 한 시대를 풍미한 풍수인들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그들 세대에 비해 풍수가 쇠퇴한 점도 있지만, 그들의 노력이 밀알이 되면서 풍수의 수준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