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맹사성 고택·묘와 흑기총

최고관리자 0 808 2016.12.26 14:01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39>맹사성 고택·묘와 흑기총

 
최영 장군 살았던 집… '북향 명당'으로 유명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해 봄날-.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 대감이 집 뒤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 어린 동자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큰 짐승을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짐승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도 못했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 않는 고불이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들!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줄달음치고 난 다음 고불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소죽을 쑤어다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꼬리를 치며 고불을 따라 왔다. 집에 데려와 정성껏 거두며 주인 잃은 소를 찾아 가라고 동네방네 소문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고불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다.
 세종 20년(1438) 79세로 고불이 죽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죽었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고불 묘아래 묻어 주고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 했다. 지금까지도 검은 소 무덤, 흑기총은 고불 묘를 금초할 때 빼놓지 않고 벌초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7월 우기 철에 산을 오르면서 만나는 날씨는 30도를 오르내리는 땡볕 아니면 장맛비다. 어쩌다 구름이라도 낀 날이면 시야가 흐려 사신사도 제대로 구분 못하게 될 때가 있다. 이래서 산은 낙엽 진 늦가을에 봐야 제일이라 했다. 함께 간산 길에 나선 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30여명의 회원들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묘역을 오르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 27에 있는 고불 묘는 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돼 있다. 노구를 마다 않고 여름 산행 길에 나선 송암 강환웅 박사(사단밥인 대한풍수지리학회)는 고려 때 성행하던 비보풍수를 적용한 조선 초기의 무덤임에 유의하고 면밀히 살펴볼 것을 강조한다.
 “횡룡(橫龍)으로 밀어주는 기세가 약하지요. 봉분까지 내려가는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게 이어졌을 겁니다. 이런 물형에서 짜여 지는 국세는 좌청룡이 힘을 못 받아요. 사람 얼굴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듯이 대자연의 사신사도 법도에 따라 형성되는 것입니다.”
◇검은 소 묘인 흑기총. 고불이 죽자 사흘을 굶어 따라 죽었다.
 굳이 나경을 꺼내 좌향을 보거나 물길을 안 살펴도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에 따른 사격론(四格論)은 어떤 풍수이론보다 앞선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봉분 뒤에 서서 전후좌우를 조감하니 우백호는 세 겹으로 중첩돼 잘 쌌으나 좌청룡이 약하다. 당판으로 내려온 내 룡맥이 약하다 보니 좌우를 인작(人作)으로 보강했다. 혈처 좌측에 큼직한 비석을 세웠다. 묘역보다 높은 안산이 등 뒤로 보이면서 배신한 듯한 국세가 마음에 걸린다. 묘는 해좌(북에서 서로 30도)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으로 남향에 가깝다.
 “좌측에 집중된 석물은 제대로 배치한 것입니다. 고불 묘의 을진(동남쪽)향이 허하다 보니 바로 이곳에 비보책으로 세운 거예요. 이 돌 위치 하나가 600년 가까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사(地師)들 간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현재 묘 위치에서 2m 정도를 내려가 여기서 한번 국세를 다시 살펴보란다. 당판 내 혈장(穴場)의 2m 차이가 이렇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싶다. 학회 회원들도 현장학습 내용을 기록하느라 여념이 없다.
 고불 묘 내백호 쪽으로 가시덤불을 헤쳐 500m쯤을 가니 검은 소 무덤인 흑기총이 있다. 동물 애호가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라고 한다. 소 무덤은 주인의 무덤과 같은 좌향이다. 아무렇게나 파묻은 막무덤인 줄 알았는데 몇 구비로 결인(結咽)목을 치며 내려온 내룡맥에 전순까지 제대로 갖춘 자리다. 사성(묘의 양 날개)은 없지만 자그마한 상석과 함께 벌초도 단정하게 되어 있다.
 1993년 경북 상주에서도 ‘의로운 소’ 얘기가 있어 세인들을 감동시킨 바 있다. 자신에게 먹이를 주고 아껴주던 이웃집 할머니가 죽자 그 소는 묘를 찾아다니며 울부짖었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공동으로 소를 매입해 ‘사람대접’을 하며 성심껏 보살폈다. 지난 1월11일 그 소가 천수를 누리고 죽자 상주시에서는 소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의우총(義牛塚)’이라 이름하여 묘도 잘 써주었다.
 고불 맹사성은 방촌 황희와 함께 동시대를 살며 세종시대를 활짝 꽃피운 청백리 명재상이다. 그들의 행장과 업적은 익히 알려진 대로 굳이 열거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위인들이다. 맹장(猛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고 했다. 고불과 방촌을 알아주는 세종이 있었고, 세종을 떠받치는 두 재상이 있어 민심이 뒤숭숭한 개국 초임에도 조선왕조는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광주에 있는 맹사성 묘. 여말선초의 비보풍수가
 적용된 묘역이며 인작(人作)으로 당판을 조성했다.
 세종대왕은 두 사람의 성격을 정확히 꿰뚫어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방촌은 강직한 데다 매사가 분명하고 정확하여 학자적 기질이 농후했다. 반면 고불은 예술가적 심성이 짙어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어질었다. 그래서 세종은 결단력이 요구되는 이조 병조와 외교문물의 제도 정비 등은 방촌에게 맡기고, 유연성이 필요한 예조 공조와 과거응시자들의 학문적 점검 등은 고불에게 맡겼다.
 특히 고불은 풍수지리에도 통달해 벼슬길에 있으면서 무례한 지방호족들을 풍수학으로 혼내준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그가 안동의 지방부사로 부임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안동에는 김씨라는 세도가가 있어 고을부사도 눈 밖에 나면 전출시키거나 파직시키는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지방 관리의 안내로 엉겁결에 부임인사를 하게 된 고불이 버릇을 고쳐 주려고 마음먹었다.
 김씨 집을 살펴보니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산봉우리) 아래 입부분에 집을 지은 명당자리였다. 여기에다 건너편에는 널찍한 뽕밭까지 갖추고 있어 물형 상으로도 재물 복을 오랫동안 누릴 터였다. 곧바로 맹부사는 고을 구획과 수로를 개선한다는 구실로 직류 하는 물길을 우회시켜 김씨 집과 뽕나무 숲 중간으로 하천 공사를 했다. 제방에는 옻나무를 많이 심어 뽕나무 기를 죽였다. 이후 김씨 집은 가운이 쇠멸해 세도도 못 부리고 고분고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낙동강 물줄기가 인(人)자로 갈라진 동네에 과부가 많은 것을 알고 인(仁)자 모양으로 나무를 심게 하여 남자를 오래 살게 한 사례도 있다. 인(仁)은 오행상 동쪽으로 목(木)에 해당하여 수(水·낙동강 물)와는 상생관계(金生水)를 이뤄 물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맹사성은 황희가 오랫동안 영의정 자리를 지키는 바람에 평생 최고 관직으로 좌의정에 만족해야 했다. 풍수 학인들은 이 원인을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300에 있는 그의 고택 앞 안산(백방산)에서 찾고 있다. 안산은 남 주작으로 객산(客山)이라고도 부르며 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안산이 혈처나 집터보다 높아버리면 주인을 능멸한다 하여 꺼리는 물형이다.
◇좌청룡을 보강하기 위해 혈장 왼편에 세운 석물들
 맹사성 고택에 오면 햇볕 잘 드는 정남향(자좌 오향)집을 선호하는 기대심리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정좌계향이니 북에서 동으로 약간(15도) 틀어진 정북향에 가까운 집이다. 안산이 너무나 우람 장중하여 집 뒤 설화산(또는 오봉산)과 용호상박 지세이다 보니 집터는 분지에 자리할 수밖에 없다. 설화 산에서 중심 맥으로 낙맥 하여 북쪽으로 내려온 주룡이 서남쪽(곤신방)에서 들어 왔다. 집 앞 금곡천은 동북쪽(간득수·艮得水)에서 시작해 북북서쪽인 임자방향으로 빠지면서(임파·壬破) 집 터 양쪽에서 흘러나온 물과 합류하여 환포해 주고 있다. 정면 4칸의 工(공)자형 평면 집으로 재상이 살았다는 집으로 믿기지 않는 규모다.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배치해 놓았다.
 원래 이 집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맹유(맹사성 할아버지)에게 물려주면서 신창 맹씨 가문이 세대를 잇게 된다. 맹유는 두문동 72인 중 한 사람이며 아들 맹희도가 이곳에 와 살면서 후손들에 의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고불은 개성에서 태어나 10세 때 이곳으로 이사 왔으며 최영의 손녀와 혼인했다. 현재는 21대손 맹 건식씨가 살고 있다.
 사적 제109호인 ‘맹씨행단(孟氏杏壇)’은 고불이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도보호수)에서 비롯되고 있다. 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 위패를 봉안한 세덕사(世德祠)의 옛 돌담이 운치를 보태주며 세종 때 황희 맹사성 권진이 느티나무 세 그루씩을 심어 구괴정이라 불린 정자에는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고불은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 밝아 최초의 연시조(聯詩調)로 전해오는 ‘강호사시가’ 등 많은 유작을 남겼다. 그는 소 타기를 즐겨해 보는 이들이 재상인 줄 몰랐다고 한다.

 

세계일보  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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