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海公 유복한 청년시절… 집터 生氣 덕분

최고관리자 0 1,350 2016.12.2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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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와 비깥채를 별도로 구분해서 지은 해공생가. 19세기 경기 지역 중소지주층이 살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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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인사들의 추모글이 새겨진 추모석. 무성한 잡초와 함께 생가 뒤뜰에 있다
 
 1956년 5월 2일 수요일. 수도 서울은 술렁거렸다. 15일 실시될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야당 후보의 선거유세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4∼1956) 민주당 후보가 연설한 한강 백사장에는 무려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인구 비례나 정치 관심도를 놓고 오늘날과 비교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인산인해였다. 모두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진저리 난 청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국 유권자들은 대세가 기울었다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당시 국민들은 헌법까지 뜯어고치면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우남 이승만에게 실망했다. 친일파를 단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중용하여 영구집권까지 획책하는 그를 안타까워했다. 6·25전쟁 직후의 폐허 상황에서 부정부패는 도를 넘어섰고, 주변에는 나라를 염려하는 우국정객보다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이때 해공의 선거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3일 뒤인 5월 5일. 국민들은 믿기지 않는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다. 해공이 ‘한강 백사장 연설’의 여세를 몰아 전주로 유세 가던 도중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한 것이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왕후장상도 세상을 등지고 나면 어쩔 수 없는 일―. 정치 일정은 정해진 대로 가야만 했다.
 15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또 한 번 국민들의 가슴을 치게 했다. 900여만 유권자 중 185만여 명이 죽은 해공에게 추모 표를 던진 것이다. 이 중 서울에서의 개표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아 있는 우남 표(20만)보다 고인이 된 후보 표(28만)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결국 선거는 사사오입 개헌까지 강행하면서 여당 후보로 나선 이승만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그때 한을 풀지 못한 유권자들이 지금도 건재한 채 오늘의 정치현실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해공의 정치 역정을 기리며 떠난 그의 생가와 묘에 대한 간산 길은 광복 이후 야당사를 반추한다는 데 흥미가 더해진다. 더구나 오는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기가 달아오른 요즘이다.
 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인 송암 강환웅 박사도 56년 선거 때 유권자였다. 그래서 그의 얘기는 증언에 가깝다. 동행한 30여 명의 회원들도 현직 교수의 야외강의를 듣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 올 때마다 가문의 영화가 덧없고 인간이 누리는 부귀공명조차 낙화유수 같음을 실감합니다. 저 마당에 무성한 이름 모를 풀들을 보세요. 직계 후손이 생가 관리를 못해서 그런 겁니다. 복잡한 문중 내막이 있어요.”
 경기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 160-1번지 해공 생가는 임좌(북에서 서로 15도) 병향(남에서 동으로 15도)으로 동 사택에 속한다. 목조 기와 한옥으로 구조가 색다르다. 안채는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을, 좌측에 건넌방을 두는 대신 부엌을 안방 앞에 배치했다. 바깥채는 ‘ㄱ’자 형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2칸의 사랑방을 두어 손님을 맞도록 했다. 안 대문(임좌병향)과 바깥 대문(계좌정향)과의 방향 차이를 두어 직사충(直射衝)을 겨우 비켰다. 19∼20세기 초 경기지역의 중소지주 계층이 살던 전형적인 가옥 형태다.
 생가 북 현무의 건방(서에서 북으로 45도)이 약간 꺼져 있어 살 풍이 마음에 걸리나 남 주작 앞 도로를 따라 활처럼 휘감아 도는 만궁(彎弓)형 경안천이 모든 살기를 제압하고도 남는다.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와 교편(중동학교·보성법률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등의 유복했던 청년 시절이 집터 생기 덕분이었음을 풍수학적으로 풀어내야 제대로 간산하는 것이라고 송암 (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 강환웅 박사)은 강조한다.
 여기서 동 사택과 서 사택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독자분의 질문이 있어 설명하고자 한다. 동·서 사택은 향(向)으로 결정하는 것이나, 나경을 놓고 볼 때 단순 2등분하는 것이 아니어서 유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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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해공 신익희 묘역. 전주 유세에 나섰다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서해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당판은 길격이나 내 청룡보다 외 청룡이 강한 국세다.
 
 나경에 표시된 갑·묘·을·진·손·사·병·오·정의 동쪽과 남쪽 방향이 동 사택이나 북쪽에 있는 임·자·계의 향도 이에 해당된다. 반면 서 사택은 남서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미·곤·신·경·유·신·술·건·해의 향과 동북 사이에 들어 있는 축·간·인의 향으로 놓았을 때다.
 이때 혼란을 가져오는 좌와 향이 대표적으로 묘좌(동)유향(서)이다. 좌는 동 사택인데 향은 서 사택이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향을 기준하므로 당연히 서 사택이다. 반대로 동향집인 유좌 묘향은 좌는 서향이나 향이 동향이므로 동 사택이다. 복잡한 설명인 듯하나 나경을 펼쳐놓고 좌와 향을 돌려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시중에는 동·서 사택 좌향을 색깔로 구분해 놓은 나경이 판매되고도 있다.
 생가 후원에 들어서니 해공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 개의 표석들이 즐비하게 흩어져 있다. 개중에는 무성한 들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마당 곳곳의 인분이 악취를 풍긴다. 후손이 살고 있지 않은 이집은 경기도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돼 있다. 생가 바로 앞에 산다는 안선근(57)씨가 “후손 간 재산 관계로 법정 소송 중이어서 관리가 어렵다”고 귀띔해 준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해공 묘역. 그해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사 지낸 곳이다. 백두대간이 한북정맥으로 갈려 서울을 향해 치달으면서 도봉산, 북한산으로 이어놓고 석산(石山)으로 기를 모아 놓은 곳이다. 한반도는 지기를 모으는 화강암 지층이어서 좁은 땅에서도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는 송암(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 강 환웅 박사)의 풍수학적 풀이다. 반대로 현무암으로 이뤄진 화산지대는 오히려 기를 배출해 물형 국(物形局)이 형성돼도 명당 혈처가 드물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화장을 선호하는 일본의 장법 형태가 우연이 아니며 화산지질 때문이라는 것이 학문적 논거다.
 “용맥이 갈라져 내려오면서 좌청룡이 탈진했어요. 친손이 힘든 자리이나 대신 외 청룡이 훌륭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우백호는 암반으로 잘 내려와 딸들이나 외손은 음덕 입을 혈처라고 판단됩니다. 좌향만 달리 놓았어도 나았을 것입니다.”
 경좌(서에서 남으로 15도)갑향(동에서 북으로 15도)이니 거의 정동향이다. 당판은 누가 봐도 왕릉 자리처럼 국세가 잘 짜여 있다. “이런 자리는 기가 센 혈처여서 문약한 사람은 오히려 화를 입는다”는 것이 송암(강환웅 박사)의 설명이다.
 해공이 죽자 경기 광주에서는 아들 신하균을 3, 5, 6대 의원으로 뽑아 국회에 내보냈다. 1975년 세상을 뜨자 해공 묘 좌청룡 자락에 신좌인향으로 용사했다. 한낮에도 볕이 안 드는 음습한 봉분 주변에 쇠뜨기 풀과 활짝 핀 고사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송암(강 환웅박사) 은 “아시다시피 저 풀은 그늘에서 잘 자라는 습지식물입니다. 당판에 물이 든다는 것은  사신사의 국이 형성되지 못하고 내 룡맥이  없고, 또한  입수용이  펑퍼짐하거나 약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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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좌향과 비껴 있는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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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입구에 있는 ‘해공로’ 표지 입석과 동상.
 
 해공은 고려 초 개국공신인 신숭겸 장군을 시조로 하는 평산 신씨로 조선 말 판서를 지낸 신단의 5남이다. 임진왜란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충주 탄금대 결전에서 패하자 달천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신립(1546∼1592) 장군의 10대손이기도 하다.
해공은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가담한 뒤 일본군의 지명체포령을 받자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26년간 망명 생활을 한 독립운동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기초하고 국무원 비서실장, 의정원 부의장을 지낸 거물 정치인으로 백범 김구와 노선을 함께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힘은 독립저항군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 사람으로 귀국해서는 대한 독립촉성회를 결성해 부의장에 취임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선도했다. 백범 등 임시정부 세력의 남북협상론보다 우남을 중심한 단정(單政)불가피론을 수용해 백범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국민대학 학장, 자유신문 사장 등을 지내며 초대 국회의장이던 우남이 대통령으로 뽑히자 2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복 직후의 혼란정국에서 무난한 정치행보였다.
 해공과 우남이 결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의 5·10 총선을 앞두고서다. 선거를 거부한 백범계열의 한독당 인사 기용을 제의했지만 우남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후일 정치사가들 중에는 당시 우남이 해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범 측 인사를 포용했더라면 우리 현대정치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후 해공은 대한국민당 대표최고위원,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 위원장,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내면서 고난에 찬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의 정치현실과 맞물려 시사 하 는바 작지 않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사람들만 현재 20명이 넘는다.

 

200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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