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54>세자 방석 (애기릉)

최고관리자 0 1,227 2016.12.26 14:18

2007년 12월 01일 (토) 10:56   세계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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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릉 앞의 안산과 조산. 6월의 무성한 녹음과 함께 사신사 국세가 꽉 차 있다.
우측 뒤에 피고하여 잠시 앉아 있는 송암
 
 급보를 접한 태조 이성계는 억장이 무너졌다. 다섯째 왕자 정안대군(방원·후일 태종대왕)이 여덟째 왕자로 세자인 의안대군(방석)과 형 방번(무안대군)을 무참히 죽여 버린 것이다. 일평생 무장으로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였지만 일찍이 이보다 더한 슬픔은 없었다. 태조는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자식을 앞세운 애비가 임금 자리는 무엇이고 산해진미인들 입에 당길 것인가. 둘째 왕자 영안대군(방과·정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 함흥 땅에 가 권력무상에 치를 떨며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삭였다. 국사 무학자초(無學自超)한테 불쌍히 죽은 방석의 묏자리나 쓸 만하게 잡아 주도록 일렀다. 칠십이 넘은 무학대사(1327∼1405)는 태조의 명을 받들고 명당을 찾기 위해 경기도 일대를 바삐 돌았다. 한양에서 멀지 않은 광주 땅에 이르러 무학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만한 대길지가 아직껏 남의 눈에 띄지 않고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그러나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면 무얼 하겠는가. 17세 어린 나이로 죽은 세자에게 후사(後嗣)가 없는 것을…. 그나마 영혼이라도 편히 안식하라고 태조에게 아뢴 뒤 방석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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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광주에 있는 초봉세자 의안대군 방석과 부인 심씨 묘(뒤쪽). 무학대사가 잡은 몇 안 되는 명당 터로 장방형의 전형적인 고려 묘제다. 이곳에서는 ‘애기릉’으로 불린다.
 
  무학은 천지간 이치를 꿰뚫어 본 도통인으로, 고려 국사 나옹선사의 법제자였다. 도선-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지는 도참풍수의 신풍(神風)맥으로 사람의 관상은 물론 땅을 보는 지상(地相)까지 신인 경지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전장을 누비며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칠 때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고, 지운이 쇠멸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케 하여 궁궐 터를 잡은 그다. 정남향인 자좌(정북)오향(정남)이나 계좌(북→동으로 15도)정향(남→서로 15도)이 아니면 혈처를 안 잡을 정도로 볕 잘 드는 국세를 즐겨 찾았다는 무학대사. 그가 잡은 명당 터는 전해오는 설화로만 무성할 뿐 실제 소점(所點)한 곳은 흔치가 않다.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태조의 건원릉, 조선왕조 법궁인 경복궁 궁궐지 등 불과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서 경기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152번지에 있는 방석 묘는 풍수를 공부하려는 후학들에게 커다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에서 성남 쪽 남한산성을 횡단하여 광주 쪽으로 들어서면 새로 난 신작로들로 수개월 전 다녀갔던 사람들도 어리벙벙해진다. 이곳에 와서 ‘의안대군 묘’나 ‘방석 묘’를 물으면 모른다는 사람들뿐이다. ‘세자 묘’라거나 ‘애기릉’이라고 불러야 금방 알아 듣는다. 경기도기념물 제166호라는 묘 입구 안내표지판에도 의안대군 묘와 함께 애기릉이라고 병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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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 묘 뒤의 입수 내룡맥. 산등성이에 남은 눈이 꿈틀대며 기어 내려오는 생룡 같다.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 찍은 사진이다.
 
 지난 6월 하순 송암 강환웅 박사(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와 간산회원 일행이 애기릉에 왔을 땐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살찐 생룡이 꿈틀대며 기어 내려오는 듯한 입수 내룡맥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내고 싶었으나 나뭇잎과 질척거리는 황토 흙은 분수척상(分水脊上·비가 내릴 때 빗물을 양쪽으로 갈라 흐르게 하는 등성이 지점) 구분을 불가능하게 했다. 필자는 낙엽이 지고 첫눈 내리기를 기다렸다.마침 애기릉을 다시 찾아온 날은 첫눈이 쌓인 데다 바람까지 몹시 불어 내룡맥에만 눈을 남기고 모두 날려 버렸다. 완벽한 표현에는 못 미치겠지만 ‘절반의 성공’으로 생각하는 내룡맥 사진만 봐도 무학대사 의중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산세여야만 혈처에 기가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을 보려면 살진 여름산보다 옷 벗어 앙상한 개골산(皆骨山·겨울산)을 보라 했다. “한강 이남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고려 묘제 장법입니다. 장방형 둘레석의 봉분에다 상석, 묘비, 향로석, 좌우 문인석 등이 조선 묘제와 판이하게 달라요. 조선 개국 초였으니까 이 시기 무덤은 여말 장법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겠지요.” 좌향은 역시 무학대사가 염두에 두었다는 자좌오향이다. 방석 묘 뒤에는 세자빈 부유(富有)심씨 묘가 같은 봉분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 대개 부부를 한 자리에 용사할 때는 한 봉분에 합폄하거나 좌우(가로)로 쓰는데 남편 위에 부인을 쓰는 예는 드물다. 송암이 일행과 함께 입수룡맥을 오르며 궁금증에 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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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평대군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8호) 내에 있는 무안대군 방번 묘. 방석의 친형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함께 화를 입었다.
 
“당판의 응기혈(應氣穴)에 따라 다릅니다. 단혈(單穴)일 때는 일명당 일묘를 고수할 수밖에 없지만 복혈(複穴)일 경우엔 쌍분으로 나눠 씁니다. 복혈 중에서도 혈처가 넓을 때는 좌우로 쓰지만 상하로 혈이 맺히는 곳도 많아요. 이곳에는 아래위로 혈이 뭉쳤습니다.” 용맥에 올라 안산과 조산을 내다보니 층층이 여러 겹이고 내청룡·외청룡과 내백호·외백호가 수없이 감싸안고 있다.
 마치 성문만 닫아 놓으면 어떤 외침도 천년 만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이 안도감을 주는 도성 안 같다. 여기에다 금상첨화로 내룡맥이 압권이다. 힘차게 내리꽂는 직방폭포 물줄기를 타고 오르려는 굵은 뱀장어의 몸부림과도 흡사하다. T자형의 맨 끝에 묘혈이 매달린 형국이다. 봉분 뒤의 응기석이 심상찮아 송암 강환웅박사에게 물었다.
 “바로 이곳 화강암에 와 기혈이 멈춘 것입니다. 천하의 무학대사께서 이 땅기운을 놓칠 리 있겠습니까. 이런 명당 자리에서 득수와 파수를 따지며 물길을 본다는 건 부질없는 중국 풍수의 폐단이지요. 아마 이 혈처에 다른 왕손이 묘를 썼다면 대역죄로 몰렸을 것입니다.” 절대왕권 시절 임금이 나올 자리라는 군왕지지에 묘를 잘못 쓰면 그 저의를 의심받아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역죄로 몰려 국문을 당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런 자리임을 알고도 후일 태종은 방석 묘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게 해 600여년 세월 동안 한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후손이 없어 후환을 염려 안 해도 됐기 때문이다.
  태조에게는 조선왕조 개국(1392) 전에 세상을 떠나 왕비로 추존된 신의(神懿) 고황후 한씨 태생의 여섯 왕자(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와 계비 신덕(神德) 고황후 강씨 소생 두 왕자(방번 방석)를 합쳐 여덟 대군(大君)이 있었다. 개국 초 조선의 가장 큰 현안은 왕실의 대통을 잇는 세자 책봉 문제였다. 개국공신 배극렴, 조준 등은 정안대군(방원)을 밀었으나 계비 강씨와 정도전, 남은 등은 의안대군(방석) 책립을 들고 나서 관철했다. 처음에는 강씨 큰아들인 무안대군 방번(芳蕃·1381∼1398)을 내세웠으나 ‘성격이 광망(狂妄)하고 경솔하다’ 하여 방석(芳碩·1382∼1398)으로 바뀐 것이다.
 무학은 천지간 이치를 꿰뚫어 본 도통인으로, 고려 국사 나옹선사의 법제자였다. 도선-지공-나옹-무학으로 이어지는 도참풍수의 신풍(神風)맥으로 사람의 관상은 물론 땅을 보는 지상(地相)까지 신인 경지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전장을 누비며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칠 때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했고, 지운이 쇠멸한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케 하여 궁궐 터를 잡은 그다. 정남향인 자좌(정북)오향(정남)이나 계좌(북→동으로 15도)정향(남→서로 15도)이 아니면 혈처를 안 잡을 정도로 볕 잘 드는 국세를 즐겨 찾았다는 무학대사. 그가 잡은 명당 터는 전해오는 설화로만 무성할 뿐 실제 소점(所點)한 곳은 흔치가 않다. 경기 구리시 동구릉 내 태조의 건원릉, 조선왕조 법궁인 경복궁 궁궐지 등 불과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래서 경기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152번지에 있는 방석 묘는 풍수를 공부하려는 후학들에게 커다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에서 성남 쪽 남한산성을 횡단하여 광주 쪽으로 들어서면 새로 난 신작로들로 수개월 전 다녀갔던 사람들도 어리벙벙해진다. 이곳에 와서 ‘의안대군 묘’나 ‘방석 묘’를 물으면 모른다는 사람들뿐이다. ‘세자 묘’라거나 ‘애기릉’이라고 불러야 금방 알아 듣는다. 경기도기념물 제166호라는 묘 입구 안내표지판에도 의안대군 묘와 함께 애기릉이라고 병기해 놓았다.
  “한강 이남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고려 묘제 장법입니다. 장방형 둘레석의 봉분에다 상석, 묘비, 향로석, 좌우 문인석 등이 조선 묘제와 판이하게 달라요. 조선 개국 초였으니까 이 시기 무덤은 여말 장법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겠지요.” 좌향은 역시 무학대사가 염두에 두었다는 자좌오향이다. 방석 묘 뒤에는 세자빈 부유(富有)심씨 묘가 같은 봉분 크기로 자리하고 있다. 대개 부부를 한 자리에 용사할 때는 한 봉분에 합폄하거나 좌우(가로)로 쓰는데 남편 위에 부인을 쓰는 예는 드물다. 송암 강환웅박사는 이 일행과 함께 입수룡맥을 오르며 궁금증에 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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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룡맥을 우뚝 멈춰 서게 한 화강암 응기석. 바로 아래에 의안대군 부부 묘를 썼다.
 
 정안대군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던 계모 강씨와는 무서운 정적으로 변했고, 왕조 개국을 함께 도모했던 동지 정도전, 남은 등과도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록 강비와 정도전 일파에서는 정안대군을 더욱 경계하고 따돌리며 소외시켰고 아버지 태조마저 이들 편이었다. 그러나 정안대군(1367∼1422)이 누구인가. 공양왕 2년(1392) 해주에서 사냥하던 이태조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자 포은 정몽주는 이를 기회 삼아 제거하려 했다. 이를 알아챈 방원이 심복 조영규 등을 시켜 철퇴로 격살해 대세를 만회해 버린 것이다. 같은 해 7월에는 왕대비 안씨(공민왕비)를 강압해 이태조를 즉위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학계에서는 개인적 공과를 떠나 정안대군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새 왕조 창업의 국면이 어떻게 돌변했을지 모른다는 견해가 다수다.  살얼음판 같던 긴장 정국은 1396년 8월 13일 계비 강씨가 급서하자 균형이 깨진 채 소용돌이 친다. 2년 뒤 1398년 정안대군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방석 장인) 등을 몰살해 버리고 만다. 이때 이복동생인 무안대군과 세자 의안대군도 참화를 입는다. 이로 인해 신권(臣權)주의를 부르짖던 개혁파들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역대 조선왕조에는 의안(義安)대군 이화(李和·1340∼1407)와 의안(宜安)대군 방석이 있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으로 초봉(初封)세자 방석의 배다른 숙부가 되며 개국일등공신이다. 초봉세자가 될 뻔했던 방번의 묘(해좌사향)는 서울 강남구 수서동 산 10-1번지에 있는 광평대군(세종대왕 제5왕자) 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8호) 내에 있다. 세종대왕이 여러 왕자 중 가장 아꼈던 광평대군으로 하여금 무안대군을 봉사(奉祀)토록 해 현재까지 제향을 빼놓지 않고 있다.
 최근 간행된 일부 역사서에는 광평대군을 무안대군의 양자로 기록하고 있으나 양자와 봉사손은 전혀 다르다. 양자는 자기 호적을 옮겨 입적하는 것이고 봉사는 제사만 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안대군은 광평대군의 이복 종조부여서 조손(祖孫)간이 되므로 양자로 입적할 수 없는 항렬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간 인물들의 묘 앞에 설 때마다 묵언의 암시로 다가오는 교훈이 크다. 살아온 사람마다의 궤적을 역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정치적 과욕이 연년생인 방번·방석 형제를 17·18세의 소년 죽음으로 마감케 했다. 바야흐로 후끈 달아오른 정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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