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38 > ④명성황후 생가

최고관리자 0 1,427 2016.12.26 14:13

[세계일보] 2007-07-20 11:09


 ④ 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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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비 생가 전경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3)가 있고, 또한 조선조 말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가 있다. 조선조 중엽 명성왕후 청풍 김씨는 조선 제18대 현종대왕 왕비로 숙종대왕의 친어머니다. 머리가 비상한 데다 성격이 거칠어 궁중 일을 다스림에 난폭한 처사가 많았다.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 정무에까지 관여해 비난이 빗발쳤고 뜻대로 안 되면 대신들 앞에서 울부짖는 등 불미스런 일이 허다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명성황후 여흥 민씨는 제26대 고종황제의 황후로 흔히 민비로 불린다. 조정 전반에 걸친 정무 간섭은 말할 것 없고 임금을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나라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비틀거리며 편한 날이 없었다.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의 목숨 건 사투는 조선왕조 사상유례없는 구부(舅婦) 간 싸움이었다.
 이 혈투가 끝내는 500년 종묘사직을 문 닫게 하는 단초가 되어 버리고 만다. 끝 간 데 없는 정치적 야망으로 외교적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종국에는 일인(日人) 정치낭인의 칼에 맞아 시해당한 뒤 시체가 불살라지는 참혹한 최후를 맞고 만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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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내 건천궁 뒤에 있는 명성황후 시해현장 추모비
 
 풍수학인들 사이에선 “예쁜 딸 낳아 출세시키려거든 민비 생가엘 가 보라”는 말이 있다. 생가 앞에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누운 아미산(蛾眉山)을 보기 위해서다. 마치 절세미인의 눈썹을 닮은 안산이다. 묘 앞의 아미산도 경국지색(傾國之色) 출생을 예고한다 하여 반기는데 더구나 집 앞의 아미산은 당대 가인(佳人) 탄생으로 믿고 있어 쌍수 들어 반기는 물형이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 26-23번지에는 숙종대왕 장인으로 인현왕후 아버지인 둔촌 민유중(1630∼1687)의 묘가 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로 입궐하였으나 왕자를 낳지 못해 왕실의 미움을 샀다. 이 간극을 노린 장희빈의 농간과 모함으로 서궁에 유폐된 채 와신상담하며 세월을 삭힌 한 많은 여인이다.  둔촌의 묘 바로 아래에 명성황후 생가가 있다. 애당초 그의 묘를 이곳에 쓰면서 지은 묘막(墓幕·묘소 관리를 위해 지은 집)이다. 뒷날 민치록이 이곳에 살면서 민자영(명성황후 아명)을 낳은 것이다. 둔촌은 명성황후의 직계 6대 조부가 된다. 조선왕조를 통해 여흥 민씨 문중에서는 원경왕후(제3대 태종대왕비)와 함께 3명의 정비를 배출했다.  “이곳에 와서는 둔촌 묘를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좌청룡과 우백호는 빈약하지만 남 주작이 뛰어나잖아요. 바로 저 안산이 그 유명한 아미산입니다. 아마 인위적으로 조성한다 해도 저렇게 잘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송암 강환웅 박사(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는 묘역 뒤 입수 용맥은 기복 없이 힘이 분산됐으나 당판 앞의 전순(前脣)은 음택을 고를 때의 모범 물형이라고 말한다. 관상학적으로 식복을 타고난다는 여인의 ‘주걱턱’처럼 끝을 말아 올렸다. 봉분의 둘레석과 함께 혼유석 문인석 촛대석 등 석물이 많다. 해좌(북에서 서로 30도)사향(남에서 동으로 30도)이니 남향에 가까우며 향토유적 제5호다. 최근 들어 선대 묘를 치장한다고 고가의 석물 장식들을 많이 세우는데 바람직한 것인가를 물었다. “돌과 물은 오행상 금생수(金生水)여서 서로 상생하는 관계잖습니까. 높은 바위틈에 연명하는 소나무가 긴 세월을 버텨냄은 습기를 머금었다 공급해 주는 암석 덕분입니다. 이런 연유로 특히 광중의 석관은 금물입니다. 더구나 습토에 석곽을 둘렀다가는 말 그대로 물구덩이에 유골을 모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뜨끔한 사람들이 많을 듯싶다. 풍수학적으로도 봉분 앞에 함부로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복치혈(伏雉穴·꿩이 엎드려 날아오르려는 지형)에 상석이나 비석 등 무거운 석물장식을 세워 놓으면 돌 무게에 짓눌려 날지 못한다는 해석에 따른 것이다. 내친김에 혈처를 택지할 때 소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와 참나무 아카시아 등 활엽수의 생장지 차이점에 관해서도 보충설명을 요청했다. 송암 강환웅박사 는 “원래 소나무는 지나친 습기를 싫어합니다. 반면 활엽수는 습지를 좋아하고 해마다 낙엽이 땅을 덮어 버려요. 땅은 비옥해져 좋은데 해충의 은신처가 되어 벌레가 모여 듭니다. 먹이를 찾아 개구리와 뱀이 꼬여들고 때로는 광중까지 파고들어 똬리를 틀어 버려요. 그래서 묘지는 기름진 땅이 좋지 않습니다.” 둔촌 묘의 좌청룡 끝 지점에 민유중 신도비가 서있다. 내 청룡이 짧아 힘을 못 쓴데다가 안쪽이 협소하여 세운 비보 책이다. 생가는 해임좌(亥壬坐·북에서 서로 약 22도)에 사병향(巳丙向·남에서 동으로 약 22도)으로 동사택에 속하며 집 뒤 묘의 좌향을 약간 비켜 지었다. 옛 집 그대로인 것은 안채뿐이며 1995년 사랑채 행랑채 별당 등을 새로 복원했다.
 동행한 김금희 사무국장(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이 대청에 걸린 명성황후 초상화를 살펴보며 “교과서에 나온 얼굴보다 훨씬 예쁜 것 같다”고 일침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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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뒤에 있는 둔촌 민유중 묘.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아버지로 명성황후의 직계 6대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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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눈썹을 닮았다는 생가 앞 아미산. 절세미인이 태어난다는 풍수적 물형으로 특히 양택 앞의 아미산은 더욱 귀하게 여긴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출생하여 8세까지 살다 부모를 여읜 뒤 혈혈단신으로 혼자 성장했다.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된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왕 60년간 세도정치에 이가 갈린 흥선대원군은 이런 성장배경을 호재로 여겨 왕비로 간택했다. 훗날 대원군은 민비한테 온갖 능멸을 당하면서 자신의 경솔함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한번 어긋난 역사의 물꼬는 되돌릴 수 없었다. “사랑채 등을 복원하면서 대문을 잘못 냈어요. 동 사택에서 손방(동에서 남으로 45도)의 동남향 대문이 좋다는 건 양택 요결의 기본입니다. 공허한 지형에 비보 석까지 세운당시 명지관이 직사충(直射衝)을 맞게 대문을 냈겠어요?” 안과 밖의 두 대문 모두가 해좌사향으로 대청마루에서 아미산이 그대로 보인다. 대문을 나서 우측을 살피니 둔촌 묘에서 보던 것과 달리 외 백호가 새로운 기세로 내려온다. 우측으로 기운 아미산이 참으로 잘생겼다. 저 산을 보고 다녀간 수많은 풍수 학인들이 저 산 닮은 아미산을 찾느라 얼마나 속 태웠을까 하는 마음이 불현듯 인다. 어여쁜 딸 낳아 시집 잘 보내고 싶은 부모 마음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명성황후 생가에 와서는 아미산만 잘 보고 가도 ‘본전을 찾는 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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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좌향으로 복원된 안팎의 대문. 동사택에서 안채와 바깥채 대문을 한 방향으로 내는 일은 드물다

 명성황후는 열여섯 살 되던 해인 1886년 고종 왕비로 책봉된 뒤 1871년 원자를 출산했으나 4일 후 죽었다. 출생 당시 항문이 막혀 배설을 못하자 당시 개신교 선교사(의사)가 수술할 것을 진언했으나 왕실에서는 “어찌 감히 왕자의 몸에 칼을 대느냐”고 진노해 결국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2년 뒤 공주를 낳지만 당일 죽고 1년 후 다시 왕자를 생산하니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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