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남연군 묘 풍수지리

최고관리자 0 2,627 2019.07.12 13:10

필자에게 남연군 묘소는 30년간 지울 수 없는 화두와 같았다.

명당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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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마음 한 구석 짓눌리는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마음을 추스려 남연군 묘에 대해 글을 올려본다.

 


2代天子之地와 정만인
많은 사람들이 대원군 이하응의 父이자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이구) 묘를 평하며 천하대지요 2대천자지지라고 극찬한다. 이곳에 묘를 쓰고 고종께서 태어나고 임금과 황제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풍수의 계파는 틀려도 혹은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들까지도 이곳에서의 평가만큼은 이구동성 탄성이다. 아마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도록 이곳만큼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 곳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풍수를 처음 시작할 당시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의문점으로 이곳 남연군 묘를 한시도 잊어 본적이 없다.
그토록 좋은 땅이라면 어째서 국가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초래하고 조선왕실의 말로가 불행했을까?
명당은 그토록 처절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가?
몇 십 년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라면 가족을 포함한 주변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만큼 명당은 매력적인 것인가?
황제가 되었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혹시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설에 의하면 정만인은 흥선군 이하응에게 2代天子之地를 추천하였다고 하는데, 정만인이 역사적으로 실존인물이었는지 알 길이 없으며, 그 말의 사실여부 또한 어떠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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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상황을 매천야록에서 살펴보자

 

남연군 아들 4명중 흥선군은 그 끝이었다. 남연군이 작고할 때 흥선군 나이는 18세였다.
그가 지사를 따라 덕산에 있는 대덕사에 도착하자 지사는 한 고탑을 가리키며
“저곳은 큰 길지라 그 귀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고 흥선군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의 재산을 모두 팔아 현금 20,000냥을 마련  한 후 절반을 대덕사 주지에게 주고 절을 소각하도록 하였다.
이에 절이 모두 타버리자 흥선군은 상여를 모시고 가서 재를 쓸고 그곳에 머물렀다.
한밤중에 그의 형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각기 꿈 이야기를 하였는데,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꾸짖기를 “나는 탑신(塔神)인데 너희들이 어찌 나의 사는 곳을 빼앗아 가느냐?
  만일 이곳에 장사를 지내면 제사가 끝나기 전에 너희 4형제가 폭사할 것이니 속히 돌아 가거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3형제의 꿈이 모두 동일하였다.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과연 그렇다면 참으로 길지입니다.
  종실이 몰락하여 우리 형제들이 옷자락을 끌고 날마다 안동 김씨의 문전을 찾아다니며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한때 잘사는 것이 쾌하지 않겠습니까?
  형님들은 모두 자식이 있지만 혈육 하나도 두지 못한 것은 저 혼자뿐이니 죽어도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씀 마시고 계십시오.”라고 하였다.
그가 이른 아침에 탑을 무너뜨리고 보니 탑 터가 모두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도끼로 팠지만 도끼는 튀기만 하자 그가 도끼를 어깨에 메고 공중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 그런 후 다시 도끼질을 하니 튀지 않고 암석이 잘 파졌다. 이렇게 하여 하관을 한 후 훗날 누가 옮길까 염려되어 쇳물을 수만 근 지어붓고 그 위에 흙을 씌었다.

장사를 마치고 스님과 함께 경성으로 가던 중 수원의 대포진을 건널 무렵 배에 탔던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불을 끄라고 말한 후 머리를 움켜쥐고는 불에 탄 모습을 하더니 잠시 후 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은 남연군 묘가 복치형(伏雉形)이라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 14년 만에 고종께서 탄생하셨다.(1852년)>>
갑자년(1864, 고종 2년)이후 나라에서는 국비를 들여 대덕산에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고 하였다. 土木에 금을 칠하여 극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그리고 논밭도 하사하고 보화도 후하게 주었다.

병인년(1866) 겨울에 양인들이 강화에서 도주할 때 사교(邪敎)에 빠진 우리 백성들은 그들을 덕산으로 인도하여 그 묘를 파헤치려 하였지만 파지 못하고 다만 그 묘에 불만 지르고 달아났다. 대원군은 이건창에게 장례 치른 일을 말하면서 탑을 헐고 보니 그 속에 백자2개, 다병2개, 사리3개가 있었는데, 사리는 작은 머리만하여 빛이 매우 밝고 물에 담그면 물을 빨아들이며, 靑氣는 실오라기 같은 연기 같았다고 하였다.

 

위 매천야록의 기록을 추산하면 남연군의 묘를 쓴 시점은 1838년 헌종 4년이 된다.
그러나 예산군청의 자료에 따르면 1846년 경기도 연천에서 이장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사전에는 남연군이 1836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절의 이름도 매천야록에는 대덕사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예산군청의 자료는 가야사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매천야록의 다른 부분에 山人萬印이 대원군을 만나서(1864년, 고종2년) 팔만대장경의 간행을 부탁하자 흔쾌히 들어 주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萬印이 남연군 묘를 잡아준 지사와 같은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다.
흔히들 말하는 鄭萬仁은 손석우 선생의 ‘터’(1993년 출간)라는 책 이후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손석우 선생은 매천야록에 나오는 萬印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소설에 차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 묘를 쓰고 나서 고종과 순종 두 분 황제를 배출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이 대원군의 극적이며 풍운아적인 삶에 귀납적으로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있으며, 아니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2대천자지지라는 말을 유포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당시의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 같으면,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심한 정치적 갈등으로 대립하였고,
고종임금 때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궁궐에 화재가 빈번하여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있다.
고종은 자신의 이복형인 이재선에게 역모를 도모했다하여 사약을 내리며,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은 임오군란 때 난민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 후 대원군은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온갖 수모를 당하였고,
이 은황태자(훗날의 영왕)역시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에 인질로 붙들려간다.
급기야 국모인 명성황후는 일인들의 칼에 무참히 살해되고,
경술년(1910)에는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고종과 순종 두 분 황제는 재위기간 동안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외세의 눈치를 살피며

신하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형식적인 허수아비 군주였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들은 일제의 침탈에 극도의 혼란과 수난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들어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말도 있다.
이렇듯 처참한 일들이 남연군 묘소를 쓰고 약 70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인데, 과연 그와 같은 것을 명당의 발응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꼭두각시 임금이 되어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죽임까지 당하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명당의 응험여부를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명당의 말로가 그토록 비참하고 굴욕적인 것이라면 고통을 인내하며 풍수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

이제부터 남연군 묘 터의 풍수지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

  

주산
혈을 맺는 주산은 산천정기를 직접적으로 공급해주는 모체산이기 때문에 단정하고 수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 가야산의 모습은 매우 억세고 거친 모습이다. 名山에 明堂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은 등산을 하는 데는 좋을지 몰라도 혈을 맺기에는 부적합한 산이다. 가야산의 모든 봉우리들은 불꽃같은 형상이니 화형산(火形山)에 속한다.
火則尖利帶殺, 火無穴也 (화형산은 뾰족하여 날카로운 살을 띤 것이니, 화형산에는 명당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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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세(龍勢)
가야산 석문봉에서 남연군 묘소까지 오는 용은 매우 길게 끌고 내려왔다. 비록 주산이 험해도 길게 뻗은 용맥이 많은 기복을 거치면서 점차 살을 벗고 곱게 변화하면 혈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이곳의 용세는 질서도 없고 규칙도 없이 산만할 뿐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맑고 건강한 맥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혹자는 그렇게 힘차게 끌고 내려 왔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집스런 주산으로부터 도망치듯 급하게 빠져나오다 보니, 상하좌우의 흐름과 변화에 따른 기본적인 원칙을 전혀 지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역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껍데기만 요란한 광룡(狂龍)일 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곳은 황제를 배출한 큰 혈이기 때문에 보통의 상식적인 안목과 평범한 法眼의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지만, 이곳이 어째서 괴혈인지를 먼저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어떠한 괴혈일지라도 용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법이다.


당판
남연군 묘소는 당판 곳곳에 강한 암반이 깔려 있는데, 그 암반이 힘과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토록 강한 힘이 있다면 어째서 허수아비 황제가 되었고 고작 70년 만에 나라와 백성을 맥없이 빼앗겼단 말인가?
황제로서 언제 큰소리 한번 쳐 본적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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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바위들은 크기가 너무 클 뿐 아니라 색 또한 회색빛으로 매우 단단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지표면의 암석은 땅 속의 상태를 대변하는 것인데, 이와 같은 암반은 찬 기운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더니, 누가 그 핏줄 아니라고 할까봐 가야산 석문봉의 기운을 여과 없이 이어받았다. 과연 남연군 묘소를 조성할 때 암석을 깨고 그 밑에서 흙이 나왔을까 의문이 든다. 따라서 매천야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위가 나와서 도끼가 튀었다는 당시의 정황을 새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이곳 남연군묘소의 또 다른 문제는 당판의 생김새가 매우 동그랗게 되어 있는데, 마치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완벽하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혈의 모습은 약간 타원형이 되어야 참된 것이다. 그 이유는 혈을 만들고 남은 기맥은 반드시 산 꼬리(전순)를 만들기 때문에 묘소의 앞쪽 어느 한 지점이 더욱 길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러한 기맥의 흐름을 파악할 수가 없다.
특히 20년 전 지금처럼 묘를 보수하기 전에는 묘의 앞부분으로 직접 올라 다녔는데, 그 지점을 볼 것 같으면 빗물에 패여서 겉으로 드러난 작은 돌조각들이 본연의 토질과는 전혀 달랐다. 작은 기와편들이 섞인 이질적인 흙이었는데, 이것은 왕릉을 조성할 때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그 지점에 많은 흙을 져다 동그랗게 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묘소건 보토를 안 할 수는 없다. 다만 이곳의 경우는 혈의 가부와 진위판단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거론하는 것이다. 
              

청룡·백호
남연군 묘소에서 얼핏 보면 청룡·백호가 병풍처럼 둘러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우로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여 오히려 골바람을 안내하는 통로가 되었으니, 묘소는 풍파가 많은 땅이 되고 말았다.
最忌凹風穴, 決定人丁絶 (가장 꺼리는 것은 凹風이니 결정코 인정이 끊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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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흉한 것은 청룡의 한 가지가 험한 암석으로 되어서 묘소의 앞부분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는 점이다. 청룡·백호의 소임은 혈을 보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청룡은 묘소에 대해 오히려 창을 들이대고 능멸하는 형태인데, 마치 표독스런 뱀이 머리를 곧추 세워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다.


怪石若居前案, 必有凶災 (괴이한 돌이 만약 앞에 있으면, 반드시 흉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청룡·백호가 자신의 입장과 본분을 망각하고 있음이다. 가야사가 있을 당시에도 깊은 이 골짜기가 마음에 걸렸던지 미륵불을 세워 비보하였으나, 결국 가야사도 화마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산의 至尊인 혈은 이처럼 멸시받고 핍박받는 곳에 비굴하게 머물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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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과 물길
남연군 묘소에는 안산이 없다. 그래서 물이 곧고 길게 빠져나가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만 볼뿐이다.(2.4km 직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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穴前水之直走 千財散日朝 (혈 앞으로 물이 곧게 달아나면, 천만금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흩어진다)

 

따라서 당연하게 그리고 너무나 허망하게도 군주와 백성들은 졸지에 모든 재산과 주권을 을사조약이란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통한의 피눈물을 뿌리게 되었다. 남연군 묘를 쓴지 67년 만의 일이다. 

한편 남연군 묘를 쓰고 고종이 태어나므로 고종께서는 이곳 묘소의 상징이라는 등식으로 볼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된다.


가 야 산 : 흥선대원군
묘    소 : 고종
청룡·백호 : 조정 대신들
안    산 : 명성황후
水    勢 : 國權과 강토


기세등등한 아비로부터 벗어난 고종께서 홀로서기를 할 무,렵 군주가 절대 절명의 위험에 처해있는데도 청룡이라는 신하는 저 혼자 잘살겠다고 물 따라 도망가기 급급하고,
심지어 달아나면서까지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윽박지르고 있다.
백호는 거만스럽게 솟아 임금을 핍박하고 있으며,
안산은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해야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관계로 빈자리를 틈타 썰물처럼 물이 빠지고 있다.
그래도 주산은 사태파악을 못하고 고집스럽게 유아독존의 오기와 살기만 내뿜고 있으니,  누구하나 다정다감하게 주군을 도와주지 못하고 각자의 이해득실만 따질 뿐이다.
도대체 이 묘소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절규해야 하는가?
아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정녕 이 나라를 이대로 버리시렵니까?
남연군 묘소는 고독한 모습이다. 좌불안석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근심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급기야 군주 자신도 주변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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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고종황제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크나큰 결함과 흉함을 내포하고 있는 곳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단순하게 천하대지라 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임금이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황제가 되었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창빈 묘소와 흡사하게 닮았다.
청룡백호의 비주(飛走)와 극심한 내부분열,
직거수(直去水)와 국권침탈까지
창빈 묘소와 똑같은 수모와 수난이 300년 후 재현되었다.
(창빈 묘의 손자 선조는 1592년 임진왜란을 초래했고, 증손자 인조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항복을 했다.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참담하고 굴욕적인 시기의 출발점에 창빈 묘가 있다. 창빈 묘가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內水 현충천은 칼날 같은 직수로 명당을 양분하고, 外水 한강은 반궁수로 흐르며 치고 빠지는 형태다.)
비록 두 곳 묘와 국난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할지라도 두 곳의 형세와 결과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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