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음택풍수에서 지형조건이 후손의 길흉화복에 미치는 영향

최고관리자 0 1,458 2018.11.12 18:33

다음 글은 2017년 2월 25일(토) 한양대학교 풍수토론회에서 필자(지종학)가 발표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풍수의 적용범위는 크게 음택과 양택(양기)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서는 건축, 도시설계, 부동산, 환경, 조경, 실내인테리어 등으로 범위가 확산될 뿐 아니라 세분화 되고 있다. 이는 풍수가 좀 더 현실적인 부분으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전의 풍수는 대부분 망자를 위한 묘지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면 현대의 풍수는 산 사람을 위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10년 전 부터 급속하게 변한 장묘문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연구에서 음택에 관한 부분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음택풍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혈의 구조와 생성 메커니즘(mechanism)은 풍수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학문이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것(micro)을 도외시 하면서 크고 넓은 것(macro)을 말하는 것은 수학을 모르면서 미적분을 하려는 것과 같다.
이와 함께 음택의 동기감응과 길흉화복 등 풍수의 기반을 이루는 텍스트 규명에 관한 노력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현재의 학문논리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포기한다면 풍수연구자의 책무를 저버리는 것과 다름 아니다. 


본고에서는 우선 본 연구자가 생각하는 명혈과 비혈은 어떠한 것인지 제시해 보았다. 명혈과 비혈의 구분은 귀납적 접근을 하였다. 즉 명혈의 경우 가문이 번성하고 인재를 많이 배출한 묘소를 선별한 후 풍수이론 중 형세론에 합당한 조건을 갖춘 곳으로 압축하였다. 그러나 풍수이론에 부합되지 않거나 일시적으로 인재를 배출한 경우는 배제하였다. 명혈의 특징은 산천형세의 뒷받침에 일정기간 발응의 지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비혈은 용혈사수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묘 이후 일정 기간 실패하였거나 혹은 번성하지 못한 곳을 선정하였다. 그런 다음 음택에서 좋은 터와 불리한 터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각각의 특징과 공통점을 찾고자 했다.


선정의 기준이 된 묘소의 가계도는 대종회 족보를 조사하였다. 그러나 족보에 나타난 것만으로 한 가문을 평가한다는 것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벼슬의 품계와 명성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중의 자료 중에 족보를 능가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실록이나 사료 등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족보에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적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풍수에서 물길의 형태가 어떻게 길흉화복에 미치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풍수에서 물길은 경제력과 경쟁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빠르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길흉화복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동작동 창빈안씨 묘의 물길과 지형조건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했다. 그 이유는 풍수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창빈안씨 묘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2. 明穴과 非穴의 사례

본 장에서는 풍수이론 중 형세론에 부합되고 발응 또한 지속성을 띤 묘소들을 명혈로 분류하였다. 반대로 묘 이후 불리한 일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 형세론에 부합되지 않는 곳을 비혈로 분류하였다. 
한편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 풍수에 기대하는 것은 지령인걸론 때문이다. 좋은 땅은 인간을 편하고 이롭게 하지만, 반대로 거칠고 황량한 땅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에 불리할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는 묘지든 집터든 마찬가지로 서구 지리학의 환경결정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때 양택은 길흉화복의 영향이 빠르지만 거주자의 경우에만 해당되고, 음택은 그 영향이 더디지만 자손 모두에게 오랫동안 미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 말은 풍수에서는 양택보다 음택이 길흉화복의 파급효과가 크고 넓고 길다는 뜻이다. 특히 명혈은 인재를 배출하는 한 요인이라는 믿음 때문에 조선의 풍수는 유난히 음택에 치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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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혈의 사례
다음에 소개하는 7곳은 음택풍수에서 요구하는 용혈사수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즉 주산과 용맥이 분명하고 청룡·백호와 조·안산 등의 사격이 뛰어나며, 물의 흐름 또한 원만한 곳이다. 하지만 이것은한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며, 타인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1) 연안이씨 이석형 묘소(1415-1477)
이곳은 포은 정몽주 묘소와 나란히 있어 雙乳穴로 불린다. 연안이씨 대종회 자료에 의하면 이석형의 직계후손에서는 부원군3, 정승8, 대제학6, 판서42, 공신4, 청백리2, 문과급제자 120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高孫때에 이르러 대제학 月沙이정구와 李龜 등을 배출하면서 연안이씨 최고의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묘 하나의 후손 중에서 이토록 많은 인물이 배출되기는 드문 일이다. 특히 손자 대에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장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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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풍김씨 김징 묘소(1623-1676)
깊은 산중에 꼭꼭 숨겨진 묘소로 제비집과 같이 둥그렇게 둘러싸인 와혈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묘의 후손 중 손자 대에서 김재로 김치인 부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등 6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가문의 최고전성기를 맞았다. 풍수고전에서 말하는 혈상의 조건 중 전순이 뚜렷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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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산김씨 김반 묘소(1580-1640)

대제학의 품계는 판서와 동등한 정2품이지만, 열 정승이 대제학 한명만 못하다는 말이 의미하듯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최고의 영예로운 벼슬로서 정승·판서보다 높이 우대하였다. 특이한 것은 연안이씨 중에서도 이석형의 후손에서만 3대 대제학을 비롯하여 6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광산김씨는 김반의 자손에서만 역시 3대 대제학과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전사한 아들 김익겸(23세) 묘가 위에 있으며, 아래에 김반 묘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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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수황씨 황균비 묘소(생몰년대 미상, 아들을 낫고 早卒하였다고 족보에 기록됨)
단군 이래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 정승은 이 묘 이후에 태어나며, 100년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황희, 황수신 부자가 영의정에 오르는 등 손자와 증손대에서 특히 인재가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물길이 일정부분 곧게 나가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경우 利害가 상반된다고 하는데, 황희정승의 청백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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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래정씨 정난종 묘소(1433-1489)

정난종의 직계후손에서는 13명의 정승을 배출하여 단일 가문에서는 최다 정승을 배출하였으며, 사화나 역모 등에도 휘말리지 않고 가문을 온전히 보존하였다. 이는 조선의 정치상황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특이한 점은 정난종 묘소가 묘역의 가장 아래 위치하였고 위쪽에 아들과 손자 의 묘가 있는 역장(逆葬)의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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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흥민씨 민기 묘소(1504-1568)

경기도 남양주 일패동에는 그의 선대 묘가 한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머나먼 제천까지 갔을 때는 이곳의 地利에 대해 확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땅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9대 연속 문과급제와 3대 장원을 배출하였다. 특히 증손 대에서는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했고 구한말에는 명성황후, 순종효황후, 민영익, 민영환 등 헤아릴 수 없는 인재를 배출하였다. 3대장원:광훈(관찰사)-정중(좌의정)-진장(우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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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주강씨 강회백 묘소(1357-1402)
강회백 묘는 돌혈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산기슭을 지나 논 앞에서 우뚝 솟은 것이 알토란처럼 생겼으며, 묘소는 산 정상에 乳頭와 같은 모습으로 쓰여 져 있다. 진주강씨 문중에서는 이곳을 蓮花浮水形이라 부르며, 무학대사가 점지해준 것으로 믿고 있다.
이상 사례에서 보듯이 음택 명혈은 묘 이후 약 100년 간 후손에게 영향을 주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함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존귀하게 장수하며 사는 방법이 땅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누군들 명혈에 대한 관심이 없을 것인가. 이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망이고 본능이다. 다만 천년 가까이 혈이 소진되다 보니 점점 희소가치가 높아지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과 폐해가 만연되었기에 급기야 지금과 같은 대중의 외면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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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혈의 사례
다음에 소개하는 7곳은 용혈사수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또는 어느 한 부분이 크게 미흡한 경우다. 특히 음택풍수에서 중요시하는 용맥과 물길의 형태가 불리한 곳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며, 타인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


(1) 삼미그룹 김두식회장 묘소(1925-1980)
삼미그룹은 3공화국 때에 방위산업체로 지정되어 고속성장을 하였다. 1960년대 종로구 관철동에 당시로서는 최고층인 31층의 삼일빌딩을 지어 재계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1980년 창업자 김두식회장의 타계 이후 2세들이 경영하면서부터 삼일빌딩과 삼미야구단을 처분하는 등 1차 위기를 겪게 되고, 그 후 계속되는 적자로 1997년 주력기업인 (株)三美와 삼미특수강이 법정관리에 들어감으로서 그룹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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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물은 경제력이라 하였는데, 김두식 회장의 묘소에서는 물이 길게 나가는 것이 바라보인다.
第一莫下去水地, 立見退家計 (가장 꺼리는 것이 물이 나가는 땅이니, 즉시 집안이 패할 것이다)

 


(2) 김종필총재 선영
2001년 6월, 대선을 1년 앞둔 시점 김종필 자민련총재는 부모님 묘소를 충청도 부여에서 예산으로 이장하였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도 하의도에서 용인으로 조상의 묘를 옮기고 대권도전에 성공한 예가 있어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당시에 풍수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飛龍上天形으로서 용상에 오를만한 천하명당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묘소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많은 산이 내려다보이면서 웅장한 스케일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청룡·백호가 감싸지 못해 그 사이로 물이 길게 빠진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穴前水之直走, 千財散而一朝(묘 앞의 물이 곧게 달아나면 천금의 재산이 하루아침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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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병철 회장 모친 묘소(1873-1941)
이병철회장의 경남 의령 고향 집 인근에는 모친 안동권씨 묘가 있다. 이곳에 묘를 쓰고 25년 되던 1966년, 삼성 이병철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에 연루되어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사건이 크게 사회문제가 되자 이병철회장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다. 그러자 이병철회장은 이듬해인 1967년 풍수사 장용득의 권유로 이곳 묘를 현재의 수원 이목동으로 옮기게 된다. 이곳의 지형은 묘 뒤편에 정상적인 용맥이 없어 산기슭에 궁색하게 자리하였다. 더욱 불리한 것은 묘 앞으로 직거수가 약 1km 곧게 빠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던 두 곳의 사례와 매우 흡사한 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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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빈 안씨 묘소(1499-1549)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임금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 묘가 있다. 세간에서는 1549년 쓰여 진 창빈 안씨 묘로 인하여 18년 후 그의 손자인 하성군이(16세) 방계혈통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하여 이곳 묘가 교과서적인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창빈의 후손들은 묘 이후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이 묘의 손자인 선조임금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전국토가 유린되고 백성들은 참혹한 7년의 전란을 겪어야 했다. 창빈의 증손자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과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광해군은 조카에게 폐위를 당하며, 광해군의 자식은 世孫의 지위에서 강화도로 유폐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庶삼촌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인조임금은(창빈의 고손자) 이괄의 난으로 궁궐을 버리고 도망 다니는 지경에 이르고, 급기야 병자호란을 맞게 되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그 후 인조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온 그의 長子 소현세자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毒殺하고, 며느리 세자빈에게는 사약을 내린다. 심지어 자신의 손자인 소현세자의 자식들까지 제주도에 귀양 보내져서 죽임을 당하기에 이른다. 창빈의 묘를 쓰고 100년 동안 그의 직계 자손에게 일어난 사건들로서,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참담하고 굴욕적인 시기의 출발점에 창빈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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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 묘소의 지형 중 핵심적인 내용만 살펴보겠다. 창빈안씨 묘역의 청룡과 백호는 묘를 위해 적극적으로 감싸주지를 못하고 곧고 길게 형성되었다. 마치 두 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은 것과 같아 물 나가는 것을 막아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內水인 현충천 물이 直去水로 빠진다.

 


水穿堂直過 謂之水破天心 主財不聚 人丁稀少 (물이 명당을 곧게 지나면 수파천심이라 하는데, 재물이 모이지 않고 사람도 드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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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外水인 한강 물은 곧고 둔탁하게 묘역을 향해 오다 다시 反弓水가 되었다. 혹자는 한강의 물이 앞에서 들어오는 물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구부구불 들어와서 나의 몸체를 감싸고 뒤로 흘러야 朝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의 한강물은 국립묘지를 향해 들어오다가 갑자기 등 돌려 외면하는 형상이므로 朝水라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창빈 묘소의 지형은 용호가 혈처를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바람을 내부 깊숙이 안내하는 형상이 되었다.


내수인 현충천은 直水로 빠지면서 명당을 칼로 베듯 2등분하였으며, 외수인 한강은 거세게 밀려와 치고 빠지며 반궁수로 흐른다. 이렇듯 불리한 지세임에도 불구하고 창빈의 손자인 선조임금이 방계혈통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360년간 14명의 임금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명당이며 표본적인 혈이라 부른다. 그러나 왕이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귀납적이며 감상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길흉의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해관계가 밀접한 근친의 역사를 도외시한 체 먼 훗날을 말하는 것은 동기감응 논리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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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혈과 비혈의 비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음택에서는 주산과 용맥이 중요할 뿐 아니라 물길이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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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를 보면 명혈 그룹은 국세가 잘 짜여 져 있어 물의 흐름이 보이지 않거나  평지에 있어 넓은 논밭을 물로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비혈에서는 직거수와 반궁수의 물길에서 흉화가 특히 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주산과 용맥이 없는 무맥지이거나 빗물이 침투할 수 있는 지형에서도 가문이 寒微해지는 등 불리하였다.


3. 마무리

풍수에서 길흉화복 추리는 복잡한 함수관계와 같아서 딱 꼬집어 정의할 수 없다. 특히 음택풍수에서는 좋은 묘도 있을 것이고 좋지 못한 묘도 있을 것인데, 어느 묘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난해한 것이다. 하지만 풍수에서 동기감응에 따른 길흉화복을 배제하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그것의 상관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본고에서는 비록 주관적이고 단편적인 사례지만 음택의 명혈과 비혈의 사례를 통해 공통분모를 추출해 보고자 했다. 그 결과 인재를 많이 배출한 묘소는 음택풍수에서 요구하는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주산이 뚜렷하고 용맥이 두드러지며, 혈처에서는 肥肉圓滿한 상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물의 형태는 혈처를 환포해 주거나 청룡·백호가 감싸면서 內堂水를 거두어 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는 물 빠짐이 보이지 않거나 명당이 반듯하여 논밭의 물을 안정적으로 취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비혈에서는 흉사가 많고 점차 가문이 한미해짐을 볼 수 있는데, 지형적 특징은 주산과 용맥이 불분명하고 혈처에서는 오목한 구덩이 지형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물길이 곧고 길게 직수로 빠지는 지형에서는 유사한 불리함이 반복적으로 일어남을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왕실과 관련된 창빈묘소의 불리한 물길은 조선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파괴력이 있었다.


결국 불리한 물길의 영향은 시기의 문제일 뿐 풍수고전에서 말하는 흉화가 적중함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프랙탈(Fractal)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2017년 3월 동작동 국립묘역에서 프랙탈 현상을 볼 수 있는데, 동일한 물길에서 유사한 일이 반복되었다. 편을 가르는 현충천과 등 돌린 한강물은 국론분열과 민심의 이반이라는 작금의 탄핵사태를 초래하였다. 결론적으로 유사한 지형조건에서 재현성을 갖는 풍수의 길흉화복론은 매우 타당성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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