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양성지 사당·묘와 선견지명

최고관리자 0 2,347 2016.12.26 14:02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⑥양성지 사당·묘와 선견지명

김포 평야지역의 대표적 명당 우백호 너른 들녘 富 지켜줄 것”
 
◇조선 초기의 선각자 눌재 양성지(오른쪽)와 부인 원주 변씨 쌍분.
 김포평야 지역의 대표적인 명당 혈처로 좌청룡이 강해 무관 후손이 배출되는 국세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할 수 있는 일의 역량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해와 같은 도량으로 천하를 도모하며 개인을 던지는 공의의 삶이 있는가 하면, 막행막식으로 민폐만 끼치다 만인의 지탄 속에 자취를 감추는 미물 같은 인생도 도처에 즐비하다. 조선 초기 6대(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왕조를 섬기며 68년을 살다 간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 유택을 찾아가며 송암 강환웅 박사(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와 필자는 ‘인간의 일생’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특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 아니면 의심할 정도의 많은 업적을 남긴 눌재를 논하며 오늘의 정치현실과 견줘 개탄도 빼놓지 않았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 산 32 인근에는 눌재의 사당과 묘가 있다. 새로 개발되는 산업단지가 일목요연하게 조감되는 남향 햇살 고운 구릉이다. 마치 두 마리의 학이 얼싸안은 듯한 지형이다. 미리 연락된 양재동 남원 양씨 문양공 대종회장,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북미대륙 회장 양창식 박사, 양완석 대전유성여고 교사, 양형모 중앙종친회 부회장, 양희성씨 등 종친 일행이 나와 반긴다.
 “눌재 할아버지 사상을 연구한 주제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만 8명이나 됩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제출하여 심사를 대기 중인 논문이 15편이고요. 우리 문중의 선조라서가 아니고 그분의 사상적 기반과 국가 장래를 내다본 선견지명은 놀라웠다고 생각합니다.” 양재동 회장은 눌재의 문화적 토양부터 강조한다. 이곳 김포에서 오랜 공직생활을 해왔다는 양형모 부회장이 ‘보학과 문중예절에 뛰어난 분’이라고 양 회장을 소개한다.
 눌재를 추모하는 대포서원은 1973년 전국 유림들이 중지를 모아 성균관에서 인가를 받아낸 제1호 현대서원으로 유명하다.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넘어서도 그의 명성과 공로가 변함없이 공인된 것이다. 대포리(大浦里)는 지명에서 유래를 알 수 있듯이 배가 드나들던 큰 포구였는데 바다를 막아 농지로 개간한 곳이다. 임좌병향의 정남향에 가까운 양지바른 곳으로 김포 향토유적 제1호다.
송암 강환웅 박사(사단법인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시장)와 함께 종친 일행이 대포서원 우측 산록에 부인 원주 변씨와 쌍분으로 용사돼 있는 눌재 묘역을 올랐다.
 강환웅 박사는 “김포가 원래 평야지역이라서 좋은 자리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만하면 명당입니다. 용맥이 논밭의 물길을 건너면서는 땅속으로 숨은 은맥(隱脈)이기 마련인데 생룡으로 연결됐어요. 짧은 내 청룡을 외 청룡이 감싸 안으며 우백호를 환포했습니다. 눌재 선생 후손들은 문·무관이 고르게 배출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히 간척으로 새로 조성된 전순 앞의 너른 우백호 들녘이 문중 대대로의 부를 지켜 줄 것이라고 덧붙인다. 봉분 뒤의 만두(巒頭)에 올라 먼 산에서 기복한 내룡맥을 살피니 거대한 가마솥을 엎어 놓은 듯한 산등성이 중앙에 지룡(枝龍)이 꿈틀대며 혈처로 향하고 있다.
 “봉분의 사이가 넓을 때는 쌍산(雙山·두개 좌의 중간)으로 좌향을 봐야 합니다. 건해좌(북에서 서로 37.5도)에 손사향(남에서 동으로 37.5도)이지요. 조산(朝山)으로 보이는 계양산이 아주 잘 생겼습니다. 안산보다 조산이 뛰어날 때는 가까운 후손보다 먼 후대 손들이발복하는물형입니다.”
◇전국 유림들의 요청으로 1973년 건립된 대포서원. 성균관에서 인가한 제1호 현대서원이다.
  이어 강박사는 쌍분일 때의 좌향 측정에 관한 설명이다. 물이 들어오는 입수 방향과 물길이 안 보이는 파구를 측정하려 하니 이런 지형에서는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를 적용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지석묘(고인돌)에서 근원한 유구한 한국의 자생풍수가 중국의 평원풍수보다 월등하게 적중함을 강조한다. 묘역을 내려오며 신도비 앞의 실개천을 살펴보니 좌수도우(左水倒右)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흐르면서 우백호를 싸고 돈다. 멀찌감치 보이는 외청룡 끝자락이 바깥쪽으로 휘어진 듯하여 물형론적 해석이 궁금해졌다.
 “면밀하게 살폈습니다. 저런 물형의 국세가 조상의 묘 앞에 있을 때는 후손들이 직장생활 하면서 남자 직원들의 하극상에 신경 써야 합니다. 양팔을 뒤로 제쳐서는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좌청룡은 아들과 관직을 의미하며 권위를 상징하잖습니까.”
 그러고는 당판 앞 내백호안의 곤향(서에서 남으로 45도)이 공허하니 무성한 칡넝쿨을 제거하고 재래 소나무(적송)로 비보(裨補)식재할 것을 강력히 권유한다. 인작(人作)이긴 하지만 왕릉 못지않게 조성된 전순이 넉넉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이 만들어 놓아 백년이면(人作百年) 하늘이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天作如同)하지 않았던가.
 묘역 왼쪽에는 눌재의 사당 수안사(守安祠·김포시 지방문화재 향토유적 제10호)가 있다. 계좌정향의 사당 안에는 신주와 위패를 모신 부조묘(不?廟)가 있는데 한 경내에 사(祠)와 묘(廟)가 설단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특히 부조묘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모시는 묘당이어서 역대 조상 중에 공이 큰 분을 모시는 곳이다. 불천지위 중에도 문중과 나라의 구분이 있어 종묘 공신당에 봉안된 83인의 공신들은 해당 문중의 시제 때 별도 봉사(奉祀)하지 않는 것이 바른 예법이다.
 지리산은 울창하게 반공(半空) 위에 기대이고 /천개 쯤 되는 바위 만개나 될 골짜기 물소리에 물보라가 날으네 /마을 속 청학동은 아마 나를 비웃으리라 /왜 악사(岳寺)의 종소리를 들으러 오지 않느냐고.
◇눌재의 영정과 신위가 봉안된 수안사 부조묘.불천지위로 후손들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는다.
  지리산 청학동을 둘러보고 눌재가 읊은 시다. 그는 15세기 후반 우리 정치·사상사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친 대문장가로 경륜 깊은 실학자였다. 특히 40여년의 관직생활을 통해 그가 제시한 국정 전반에 걸친 대안들은 오늘의 경세가들에게도 경이롭게 여겨지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은 눌재 사상 연구소를 통해 현창사업이 전개되고 있으며 3권 전집이 국역 발간돼 사학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취재를 돕기 위해 대전에서 온 양완석 선생은 “눌재 할아버지는 수백 년 후의 국가정세를 예견한 민족의 선각자였다”면서 그의 공적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국조 단군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제인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당시 요·순 임금만을 이상군주로 추앙하던 사대주의 사관에 충격을 던졌다. 눌재는 이미 3900년의 민족사를 편년(編年)하여 중국과 동등한 유구성을 부여했고 단군과 관련된 구월산 태백산 묘향산에 제사지낼 것도 강력히 주장했다. 세조의 어명으로 그가 그린 ‘동국지도’는 지리적 전문성과 세밀함에 현재의 지리학자들도 경탄하고 있다. 모사본으로나마 전하고 있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는 사료적 전거가 되고 있다.
  또한 눌재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85만명(현역정병 15만, 예비군 15만, 조정군 55만)의 군정(軍丁) 확보를 임금에게 주청했다. 결국 반대론자들에게 밀려 실현은 안 됐지만 그의 주장이 관철돼 강병이 양성되었더라면 조선왕조 국운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을 것이란 학자들의 의견이다. 이밖에도 농지를 개간해 수리시설의 확충에 힘썼고 각 지방에 의료기관을 설치해 양민들의 건강증진에 관청이 앞장서 진료하도록 솔선수범했다. 그가 펴낸 책은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팔도지리지 ▲동문선 ▲의방유취 ▲농잠서 등 60여권에 이르며 사학 지리 문학 경학 의학 농사 병법 등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미국에서 일시 귀국해 취재 길에 동행한 양창식 박사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시대마다 때를 앞서 밝히는 선지자가 나타나 국운을 융성케 해왔다”면서 “이 시대에도 찾아온 선지자를 바로 찾는 길이 민족의 살 길”이라고 강조한다.
◇문양공 대종회 사무실. 왼쪽부터 강환웅 박사, 양재동 대종회장, 양창식 박사,
양완석 교사, 양형모 부회장.
 눌재는 남원 양씨로 관향인 남원에서 태어나 여러 벼슬을 거쳐 정승 열명과도 안 바꾼다는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문양공(文襄公)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조정으로부터 받은 시호다. 그는 우리나라가 중국과 대등함에도 불구하고 문묘(공자 사당)에 중국 성현이 다수 배향된 것을 개탄하고 우리 성현의 추가 배향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우리 남원 양씨 문중은 양을나 시조께서 고대 탐라국 초대 왕으로 등극하여 나라를 통치한 왕손이라는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대의 뜻을 받들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일 하는 게 후손된 도리 아니겠습니까.” 양재동 대종회장의 말이다.
양재권 중앙종친회장은 “양씨 문중에 현역장성 10여명과 현직대학교수가 450여명에 이른다”면서 “문무를 겸한 고른 출세에 긍지를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양씨 전체를 아우르는 대동보를 편찬 중이며 매년 4월25일 대포서원에서 눌재선생을 추모하는 춘제를 김포시의 공식행사로 봉행하고 있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 세계일보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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