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칼럼

청와대를 옮겨라

최고관리자 0 2,934 2018.06.11 07:35

대한민국은 수도 서울이 북한산과 한강이 어우러진 배산임수의 명당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단일왕조로서 518년을 이어왔으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훌륭하게 치렀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공감한다. 서울은 풍수에서 요구하는 산과 물에 관한 지리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도시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다보니 부끄러운 과거는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조선왕조 518년은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과 침탈로 점철된 역사였으며, 해방 이후 근·현대에서는 청와대를 거쳐 간 대통령들은 대부분 말로가 불행하였다. 경제·과학·문화·스포츠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다이나믹 일등 코리아를 외치고 있지만 최고지도자와 그들의 정치수준은 늘 지탄받고 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을 오로지 청와대 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복궁과 청와대가 명당이라는 고정관념에 오랜 세월 집착했던 것은 아닌지 두 곳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즉 본 글은 서울이라는 지역적(area) 관점이 아닌 경복궁과 청와대라는 특정 장소(site)를 언급하고자 함이다. 두 입지에 대한 맹목적 쇼비니즘(chauvinisme)적 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청와대의 역사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북악산 밑에 경복궁을 창건한다. 그러나 경복궁에서의 출발은 이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부터 시작하여 급기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비극적 죽음으로 이어지며, 결국에는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고 경복궁은 폐허가 된다. 그로부터 273년간 버려진 체 방치되던 경복궁은 고종대에 이르러 대원군이 중건하지만, 45년간의 극심한 내우외환 끝에 500년을 이어온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총독부 관저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으나 곧이어 6.25라는 동족상잔의 참극을 맞게 되며, 자신도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는 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 대통령까지 모두가 순탄치 못했다.
계속되는 대통령들의 불행에 노태우 대통령은 관저를 새로 옮겨 보지만 그 또한 전임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후로는 김영삼 대통령의 IMF 사태 초래, 김대중 대통령의 자식들 구속,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과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구속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마다 매번 그러하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고통치자의 잇따른 불행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국가 이미지와 국민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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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그러한 문제는 터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문제라면 번번이 잘못된 지도자를 선출한 우리 국민들이 더 큰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풍수지리를 신뢰할 수 없거나 아니면 경복궁과 청와대가 명당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터를 선정함에 있어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재점검해 보고자 한다.

 

 

경복궁과 청와대 터의 풍수지리적 해석

주산, 북악산
풍수에서 주산은 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경복궁과 청와대는 북악산을 중심으로 궁궐이 자리했으나 배산임수의 지세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뒤편의 산이 터를 향해 자애롭게 굽어보는 형태가 되어야 하며, 등 뒤의 바람을 완벽하게 막아줄 수 있어야 올바른 배산임수가 된다. 그러나 북악산은 저 홀로 우뚝 솟아 경복궁과 청와대를 외면할 뿐 아니라 자하문 지점의 함몰로 북서풍을 유발하면서 배산임수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한편 모든 물체는 앞뒤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앞에는 태아를 잉태하고 모유하는 생식기관이 있는 반면 뒤에는 인체의 찌꺼기를 배설하는 기관이 있다. 따라서 만물을 생육하는 생기가 모이는 곳은 앞부분이다. 그렇듯이 산에도 앞뒤가 있으며, 좋은 땅은 반드시 산의 앞에서 형성되는 법이다. 주산의 앞뒤를 가리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봉우리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는가가 우선인데, 북악산의 봉우리는 노골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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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은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우듯 힘 있게 우뚝 솟은 모습이지만 산의 정상 머리 부분을 동쪽으로 잔뜩 꼬고 있으며, 경복궁과 청와대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한 품안이 편안할 수 없듯이 주산으로부터 버림받은 땅은 결코 좋은 땅이 될 수가 없다. 경복궁과 청와대는 이점이 치명적인 결함이다.

 

청룡, 낙산
청룡·백호는 좌우에서 부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로 너무 크고 높은 것은 핍박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마땅치 않고 너무 낮은 것은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을 수행치 못하기 때문에 불리하다. 따라서 바람을 막아주는 높이에 균형 있는 상태를 좋게 여긴다. 이때 근접한 산이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 가장 중요한데, 감사원에서 한국일보사까지 이어지는 내청룡은 가늘고 낮아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낙산도 인왕산에 비해 많이 낮음으로서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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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인왕산
청룡·백호의 소임은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이지만, 경복궁에서는 자하문 근방이 깊이 함몰하여 바람의 통로가 되었다. 조선 초 궁궐 선정과정에서 풍수인 윤신달은 이 부분이 허한 것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바람을 풍수에서는 산곡풍, 요풍, 질풍, 살풍 등 온통 부정적으로 부른다.
한편 자하문에는 현재는 없지만 색다른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바로 추녀에 나무로 만든 닭의 형상을 달아 놓은 것이다. 그 까닭은 문밖의 지형이 독을 품은 지네와 닮은 모습이기에 그 기세를 제압하자면 지네와 상극인 닭의 형상을 달아 놓아야 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하문은 북한산과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 교통로였으나 풍수지리상 이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문을 닫은 채 일반의 통행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을 비롯한 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을 일으켰고, 6.25때는 북한군의 서울 침공 루트였으며,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넘어오다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궁궐의 입장에서 보면 풍수적인 우려가 현실로 자주 나타나는 취약지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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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남산
안산은 전면으로부터 부는 바람을 차단하고 물이 곧게 빠지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이다. 전방의 위협으로부터 방어 장치인 셈이므로 너무 높아 고압적인 것은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안산은 주산보다 낮아서 다소곳한 형상을 좋은 것으로 간주한다. 반대로 나의 집 앞에 큰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면 일조권의 침해 뿐 아니라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후 왕실을 탄압하고자 근정전 앞뜰에 높다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어 핍박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신앙과도 같았던 풍수를 역으로 활용한 탄압이었다. 이때 안산은 오목거울 같은 형상으로 깨끗해야 하며, 골이 많거나 지저분한 형태는 등을 보인 것이라 해서 흉하게 여긴다. 하지만 남산은 등을 진 상태에서 골이 많아 지저분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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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 관악산
조산이란 주산·청룡·백호·안산을 제외한 모든 산을 일컬음이다. 관악산은 산봉우리의 모습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처럼 뾰족뾰족하여 화형산이라 한다. 그래서 관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경복궁의 입장에서는 화재가 두려워 여러 가지 비보를 하게 된다.     
•관악산 정상에 연못을 판다.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숭례문의 바로 앞에 남지라는 연못을 팠다. 
•숭례문의 현판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숭(崇)과 례(禮) 두 글자는 불꽃같은 형상이므로 불로서 불을 막겠다는 것이다.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 앞에 물을 상징하는 해치석상을 세웠다.
•경복궁 서쪽에 경회루를 파서 물을 저장하였으며, 경회루 난간에는 불을 잡아먹는다는 불가사리를 새겼다.
•경복궁의 곳곳에 놓인 무쇠항아리 ‘드므’는 화재진압 용도로 물을 담아 두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은 화재가 잦았으며, 특히 고종 대에 이르러 유난히 화재가 많았다.
그러나 경복궁의 화재가 관악산 때문이라 여기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약 관악산 때문에 화재가 잦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라면 관악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과 한남동 등에도 화재가 잦았어야 하며, 또 월출산·설악산·북한산·도봉산 등 화형산 근처의 도시는 모두 화재의 위험이 많음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경복궁의 화재는 관악산과 무관하며 다른 요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명당
일반적으로 명당이라 함은 좋은 땅을 말한다. 하지만 풍수에서 고유명사로 쓰이는 명당의 개념은 혈처 앞에 넓게 펼쳐진 논밭·들판·마당을 말한다. 주산과 청룡·백호·안산이 둥글게 감싸주어 산과 물이 모이는 지점으로 용상이 혈처라면 신하들이 도열하는 마당이 곧 명당이다.한양국세에서는 경복궁이 혈처라면 광화문 밖 종로거리가 명당인데, 경복궁의 명당은 주산인 북악산의 외면으로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수세
풍수에서 물은 경제력과 경쟁력을 의미한다. 한양에서는 인왕산의 물, 삼청동의 물, 그리고 남산의 물이 모여 청계천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동대문시장·평화시장·중앙시장·중부시장·벼룩시장 등이 형성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복궁은 주로 인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궁을 감싸고 흐르는데, 이물은 객수(客水)가 된다는 점이다.북악산이 다정하게 고개를 숙여 경복궁을 보살핀다면 주산으로부터 공급받는 안정적인 물이 되겠지만, 북악산이 경복궁을 외면함으로서 품안의 물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불 인왕산의 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내 집 안에 물이 없어 이웃집 우물을 눈치 보며 먹는 격이다. 이는 매우 의타적이고 피동적인 형태로서 한 나라의 주권과 경제적 자립을 엿볼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임에도 비중 있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경복궁과 청와대는 생기가 충만한 물을 마음껏 공급받지 못하다보니 북악산의 등에서 나오는 물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데, 이 물은 생물학적으로는 깨끗할지 몰라도 생리학적으로는 오수(汚水)에 해당된다. 좋은 물을 마셔야 신체와 정신이 건강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정했을 때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향으로 궁궐터를 지었으면 좋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추종하기도 하는데, 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지금의 옥인동 인근에 동향으로 궁궐을 지어 보겠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북악산이 좌청룡이 되지만 북악산은 고개를 돌리고 있어 인왕산과 궁궐을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자하문 근방이 심하게 꺾여 심각한 불안정 요소가 된다. 주산이 바뀌고 좌향이 바뀌었지만, 기존의 경복궁과 비교하여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천하제일복지
구 청와대에 대해 풍수적으로 불길하다고 여겨 개조를 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최초였다. 1980년 12월 이전까지 청와대는 서향이었으나 서향의 현관은 기가 빠져나가 좋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청와대의 현관을 남향으로 변경한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백담사로 가게 되자 이를 지켜본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의 불길함은 현관을 바꾸는 소프트웨어적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아예 터를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은 구청와대가 손님을 맞기 협소하다는 표면적 이유로 약 200m 서쪽으로 이동한 현재의 위치에 새로운 청와대를 건립하게 된다. 다음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실린 글이다.
총독관저 자리 물색에 내몰렸던 조선의 풍수사들은 고의적으로 용맥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만행을 도저히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조선총독을 지낸 사람들뿐 아니라 그 후에 이곳에서 생활한 대통령까지 불행한 말년을 맞았다고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90년 2월 20일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 중 천하제일복지라는 표석이 청와대 건물 뒤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표석은 암벽 전면이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습니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만든 이 표석은 가로 2m 50cm, 세로1m 20cm 크기에 글씨 크기는 세로 가로 50cm였으며, 획의 평균길이는 9cm입니다. 글씨체는 해서체였고 낙관자리에는 ‘연릉오거’라는 글을 쓴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이름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전문가가의 결론은 글이 약 3백∼4백 년 전인 조선조 중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하제일복지 표석이 발견된 지점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궁궐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사람의 발길이 잦았으며, 청와대 시절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매일 같이 수색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 발견되지 않았다가 그 시점에 갑자기 발견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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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보듯이 북악산이 정삼각형을 이루는 중심점에 청와대 집무실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북악산과 청와대가 균형감 있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은 사람과 달라서 처음의 마음을 바꾸는 법이 없다. 이 현상은 산의 옆구리에 억지로 배치한 것으로 그런다고 북악산이 청와대를 다정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이 된 것은 아니다. 결국 새로 옮긴 천하제일복지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그 후의 대통령들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경복궁과 청와대는 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산의 외면으로 모든 것이 덩달아 배척하는 지세가 되었으며, 물의 모습은 한 나라의 주체성과 경제적 자립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임에도 비중 있게 다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오판의 구체적 원인을 알 수 없으나 풍수논리가 정치논리에 묻혀 제 역할을 못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과학이론에 의한 입지의 재해석
이상 보았듯이 경복궁과 청와대는 입지 전반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복궁과 청와대가 명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랜 고정관념에 따른 감성적 인식체계이며, 좀 더 이성적인 풍수논리가 개발되지 못한 탓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청와대 입지와 현상에 대해 풍수논리가 아닌 다양한 이론으로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가이아이론과 북악산가이아이론은 동양의 풍수지리론과 흡사하다. 가이아이론이 지구전체를 유기체로 보는 거시적 성격이라면, 풍수지리론은 지구를 구성하는 산과 강을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미시적관점이다. 이러한 유기체적관점에서 북악산을 보면 북한산에서 보현봉을 거쳐 남서진하던 산줄기가 북악에 이르러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서 우뚝 멈추었다. 이때 발생하는 물리적 관성으로부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쪽 경사면 A는 암석이 단단하게 박혀 두툼하고 B는 오목한 현상이 생겼다. 만약 A지점이 약하다면 관성에 의해서 북악산은 서쪽으로 크게 기울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북악산 자체는 매우 견실하고 합리적인 상태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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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많은 사람들이 북악산과 경복궁의 배치를 보면서 명당이라 생각하는 것은 주산을 비롯한 좌청룡·우백호의 입체적 구성만 맞으면 된다는 기계론적 관점에서 북악산의 겉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의 면배와 향배를 도외시한 체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피로파괴
재료역학에서 말하는 피로파괴는 기계장치나 구조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인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이 자각할 수 없는 미미한 변화에 의한 피로누적은 서서히 몸의 불균형과 이상을 초래하기에 위험한 것이다. 청와대 경우 초창기보다는 늘 집권 후반기에 크고 작은 잡음이 생기는 이유도 불리한 환경에서 오는 피로누적의 일종이다.

 

엔트로피[Entropy] 관점에서 본 현상
엔트로피법칙은 열역학 제2법칙으로 에너지가 소멸되면서 매연과 공해 등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현상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폐기물 등이 늘어나는 것을 뜻한다.
경복궁과 청와대 역사를 보면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다. 무질서의 진행속도가 빠르고 반복되는 현상은 다른 곳보다 엔트로피가 높다는 뜻이며, 이곳은 어떠한 이유로 다른 지역보다 조건이 불리하다는 뜻이다. 결국 경복궁은 혼란과 어지러움의 무질서를 반복하다가 폐허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조선왕조 518년 동안 273년간 폐허로 방치된 것은 모든 에너지의 흐름이 멈춘 것이 된다. 그러나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자 에너지가 재생되었으나 또 다시 무질서가 빠르게 진행되다가 급기야 이제는 더 이상 재사용도 할 수 없는 열 죽음에 이르렀다. 하지만 경복궁의 엔트로피는 완전 소멸이 아니라 장소만 바꾸어 청와대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프랙탈[Fractal]이론으로 보는 반복적 수난
프랙탈이론은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현상들을 엄밀히 보면 그것들을 지배하는 배후가 있어 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있으며, 부분은 전체와 같고 전체는 부분과 같다는 자기 유사성과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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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성
경복궁과 청와대는 600년의 역사가 전체가 되며,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부분이 된다. 그런데 지난 600년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한다면 전체적 불리함과 부분적 불리함이 유사함을 볼 수 있다.

 

• 반복성       
현재의 경복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마감하고 문화유산으로 남아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경복궁에 이어 청와대에서도 세포 분열하듯 프랙탈 특징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한편 양자역학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과학은 재현성이지만 반드시 항상 늘 그런 것은 아니고 어느 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과학의 기준이 뉴튼적 엄격한 결정론적 사고에서 확률적 결정론으로 바뀐 것이다.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확률적으로 높은 분포를 보인다면 재현성과 Science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이론이다. 즉 경복궁과 청와대가 프랙탈적 유사함이 반복되지만 반드시 동일한 결과는 아니며,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상 보았듯이 경복궁과 청와대의 여러 현상은 현대의 과학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였으며, 특히 프랙탈적 유사성과 반복성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무리
조선 초 경복궁의 입지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풍수인들이 합심해서 선정했으나 명당이라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으며 기대에 부응치 못하였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 본 결과 입지 판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선정 당시를 돌이켜 보면 그 시대의 궁궐 풍수는 이론적 지식의 벼슬아치들이 주도적으로 관여하면서 땅을 보는 관점이 냉철한 이성적 판단보다는 보국이 넓고 화려함을 선호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더불어 절대 권력자의 의지까지 작용하면서 결국 전문 풍수인의 지리적 제언은 별로 힘을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구청와대 역시 경복궁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다 보니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북악산은 경복궁과 청와대에 등 돌린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자하문의 허결함과 수세의 불리함, 남산의 등 돌림은 뜻밖이었다. 따라서 이제는 청와대의 입지에 대해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용산을 차지한 집단이 세계를 지배한다. 

 

남산은 험한 바위들로 뒤덮인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과 달리 부드러운 흙으로 이루어져 포근한 느낌이다. 그리고는 용산을 향해 병풍처럼 펼쳐주었다. 용산의 지형은 서울의 동서로 흐르는 한강 물이 크게 감아주는 지점이며, 남북으로는 북한산에서 북악산 그리고 관악산을 잇는 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면서 절묘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용산은 고려시대에는 부자고을이라는 의미의 부원현이라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팔도에서 올라온 곡식과 물자가 모이는 지점으로 늘 재물이 풍족한 땅이었다.

 용산 일대에 외국군이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말 한반도를 침입한 몽고군이 용산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 고니시 병력과 가토 병력이 원효로와 청파동 일대에 각각 주둔했으며,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병력 3천명이 주둔하였다. 또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이곳 용산에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관저, 20사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해방직후부터는 미군이 차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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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을 보면 용산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침략자 점령군의 땅이었다. 점령군이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릴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한반도의 역사요 사실임을 냉엄하게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보면 결국 용산을 차지한 자가 한반도를 좌지우지 하였다.
다행히 이곳에 있던 주한미군이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했으니 용산을 더 이상 외국군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보호하고 활용해야 한다.
한편 현재의 청와대는 경복궁 뒤편 깊숙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국민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고 지적되기도 하는데, 이곳 용산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사통팔달의 열린 공간이다. 또 완벽하게 살을 벗은 겸양지덕의 땅으로서 국민에게 편안히 다가서는 모습이므로 백 년 만에 우리의 품으로 돌아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용산을 차지했던 집단이 한반도 뿐 아니라 대륙을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겨라. 

 

청와대와 용산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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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청와대 입지의 재조명”, 관음출판사, 2011.
               “건강한 삶 성공한 삶 풍수지리”, 프로방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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