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론

風水書와 風水師

최고관리자 0 2,181 2016.11.28 15:17

제6장  風水地理의 原論   
 
第4節 風水書와 風水師
 Ⅰ. 風水書
   신라와 고려시대에 使用되어졌던 여러 地理의 要體인 風水書籍은 約180여종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와 이조시대에는 풍수서가 陰陽科의 과거 시험의 한 과목이었고 이때 주로 사용된 書  의 명칭은 靑烏經, 금낭경, 胡舞中, 明山論, 地理門庭 提脈賦, 疑龍, 洞林照膽, 經國大典 等이다.

Ⅱ. 風水師
   풍수지리론에 립각하여 땅의 길흉을 관찰하는 사람를 風水師, 地師, 地觀 또는 地官이라 부르고 있다.
   地官은 항상 관원으로 속해 있는 것이 아니고 조정(朝廷)에서 王陵選定이 필요할 때마다 임명되어 임시 관원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때 왕가로부터 지관으로 임명     된 사람은 전국적으로 풍수지리의 第1人者로 선출된 者로 가장 우수한 風水師로 인정받게 되었다.
   초기 風水師가 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한문 지식이      해박해야 되고 風水의 서적을 여러번 학습한 후 선배 풍수사에게 실지의 지도과정을  거친 후에 드디어 全國의 山을 답산 하여 이론과 실제의 부합 여부를 공부한 후에야      풍수사의 자격을 얻게 되었으므로, 풍수사가 되기 위해서는 십여 년의 오랜 연구가  필요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관으로 임용될 수 있는 자는 모든 과정을 이수한 후에 經國大典에 규정된 지리학과의 전부를 통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風水師는 한문의 지식이 많은 자 만이 공부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경제적 으로나 계급적으로 여유가 있는 양반 이상의 신분이나 되어야 시도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 風水師의 지위에 오른 자는 사회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과거로부터 승려 중에서 많은 풍수사가 배출되었다. 역사상 손꼽히는 풍수사로는 道詵 (신라말),  無學(李朝),  西山大師, 釋休靜(李朝),  宣祖時代  南師古(李朝 明宗時代) 등이 있다.
  
1. 정감록(鄭鑑錄)
    1) 沿 革
         정감록(鄭鑑錄)은 풍수지리 및 음양오행설을 근본으로 한 일종의 예언서로서 李氏 선의 흥망과 정씨가 나라를 이룰때 까지를 예언하였다는 圖讖의 일종의 예언서이다.
         원래부터 鄭鑑錄이 印本이 아니고  筆寫로 유포되는 과정에서 원저자 아닌 사람에 의하여 오자나 脫字는 있게 마련이며 또 첨삭 혹은 수필(手筆)을 하여 冊마다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여 오늘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作者는 미상이나, 無學, 鄭道傳, 南師古등이라고 하기도 한다. 冊마다 진본이니, 사본이니, 원본이니 하는 글자를 붙이고 있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따라서 表題를 鑑譯. 鄭鑑錄, 遊山錄, 徵秘錄, 運寄龜策, 鑑寅錄, 秘知論 등으로 한 적도 있다.
         보통 정감록이라면「鑑訣」「東國歷代本宮陽陰訣」「歷代王都本宮數」「三韓山林秘記」등을 一括하여 汎稱한 것이다.

     2) 鄭鑑錄 및 「異本에 나타난 王朝 향국년대표」
          
     3) 十勝之址
         鄭鑑錄에서는 전국적으로 10個  지역의 땅이 각종의 병란이나 흉년등 각종 천재지변을 피할 길지 라 하고 있다. 십승지지의 지명을 책마다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이 열 개의 지명 중 빈도(頻度)수가 많은 것부터 10개소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풍기 차암 금개 촌
         (2) 가야산 남쪽 만수 봉
         (3) 公州 유구와 마곡사 사이
         (4) 예천 금강 북쪽
         (5) 영월 바로 동쪽 상류
         (6) 무주 무풍 方洞
         (7) 부안 虎岩 굴 아래
         (8) 운봉 지리산 아래 동점동
         (9) 화산 안동군에 있음.
         (10) 보은 속리산 난중항
    4) 鄭鑑錄에 대한 비판
         이는 風水地理 및 陰陽五行說에 기초를 둔 예언서이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는것이 더 많으니 이를 믿을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맞는 것도 事後에 억지로 맞추어 본 것이 많다.
         예컨데, 鄭鑑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을 맞았다 한다.
         그  근거는 이러하다.「도선비결」에 임진년 섬 오랑캐나 나라를 좀먹으니 가히  송백에 의지할 것이오. 丙子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하니 산도 물도 이롭지 못하고 궁궁이 이롭다. 이것이 바로 임진, 병자 호란을 예언한 문구이며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李朝 五百年 동안에 壬辰年은 1412年, 1477年, 1532年,  1592年, 1652年, 1712年, 1772年, 1832年, 1892年이 있고, 丙子年은 1396年, 1456年, 1516年, 1576年, 1636年, 1696年, 1756年, 1816年, 1876年이 있는데 어찌하여 1592年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해만이 정감록에 記錄된 해란 말인가?   또한 38線에 대하여 「임 이북 재재호」는 三八度線 이북이 소련의 占領下에 들어갈 것을 예언한 말이라 하는데 '再字'는 어찌 풀이할 것인가? 또한 8.15 해방에 대하여 「甲乙年이 언제 올고? 천천배가 남쪽 물가에 모이니......」 이는  해방되는 해의 사건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甲乙을 해방이 되기 전해인 甲申年과 해방의 해인 乙酉의 甲, 乙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것도 충분한 根據 가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鄭鑑錄의 예언 맹신자들이 맞는 것만 중시하고 틀린 것은 해득을 잘못하여 오해된 것이라고 하여 鄭鑑錄을 두둔하여 이를 믿고 따르는 자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예를 보더라도 鄭鑑錄의 실체가 없기 때문에 異  鄭鑑錄과 異人의 학자가 自己가 眞本이라고 저작하여 後世에 남긴 여러 가설로 인하여 混亂이 야기된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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