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풍수지리의 3대분류와 명당
제3절 양기풍수와 명당
1.수도 서울(漢陽)
이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지기가 다하여 새로운 왕조에게 불리하다고 하여 한양 천도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였고 실제로는 옛왕조 고려 충신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도읍지, 개성인지라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탐탁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왕조에 대한 민심이반에 대하여서도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 한양이라는 도읍지로 결정이 될 때까지 수많은 답사와 주장, 반론이 오고 갔는데 그 후보지들로는 현재의 육, 해, 공군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계룡산의 신도안과 신촌의 연세대학교 부근인 모악의 남쪽 및 불일사, 선재 등의 곳이 떠올랐다. 이어 태조는 손수 후보지들을 답사하는 가운데 나라에 발생하는 자연적인 이변을 관측하고 지리적인 대사 결정에 참여해 온 기존의 서운관(書雲觀)외에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임시기구로 설치하여 신도읍지 물색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운관의 지관(地官)이었던 윤신달, 이양달 등과 권중화, 정도전, 남은, 하륜등의 조정대신 및 무학대사 박자초가 태조의 특명하에 왕사(王師) 자격으로 태조의 정도(定都) 작업에 관여를 하게 된다.
그 중에서 조정대신 권중화(權仲和)가 먼저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의 명당이라며 계룡산의 신도안을 후보지로 추천한다.
태조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계룡산 주변을 확인해 보았는데 산수가 서로 유정하게 감싸 안고 있는 형국으로서 명당이자 천하의 길지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신도안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지만 공사를 시작한지 1년여만에 중단되었다. 이유는 경기도의 관찰사였던 조정대신 하륜(河崙)이 중국의 풍수법인 수호신에 의해 산세를 측정한 결과 산은 풍수지리상의 방위에 의해 건방(乾方)에서 오는데 물길은 손방(巽方)으로 나가므로 산수의 음양배합이 상호 반대로 되어 좋지 않다고 태조에게 상소하여 공사중지를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태조는 하륜의 주청을 받고 다른 대신들의 조언인 도읍지가 남쪽으로 치우쳐 균형적인 국가 통치를 어렵게 한다는 데 큰 이유로 결국 신도안의 정도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륜은 이에 모악의 남쪽인 현재의 신촌, 연세대학교 부근을 지명하여 이곳이 수법(水法)에도 합당하고 명당 형세도 갖춘 길지라고 아뢰었다.
태조가 하륜의 상소를 받고 중신들과 모악에 당도하여 살펴보니 과연 명당 형세이긴 했지만 터가 협소하여 한 나라의 도읍지로는 부적합하였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궁궐을 동향으로 짓는다면 남산으로 연결되는 우백호(右白虎)와 북악산과 낙산으로 연결되는 좌청룡(左靑龍)이라는 명당 조건이 갖춰지게 되므로 태평천하를 얻을 것" 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선조 개국공신이며 실세가였던 조정대신 정도전은 거의 비슷한 지점을 천거하기는 했으나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하여 경복궁 터를 진혈(眞穴), 즉 명당으로 삼고 남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조선의 건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물색하고 있을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었던 조정대신 하륜(河崙)은 모악(母岳)의 남쪽인 현재의 신촌, 즉 연세대학교 부근을 지명하여 명당 형세의 길지(吉地)라고 추천하였다.
* 조선의 도읍지 물색 작업에 참여했던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궁궐을 동향으로 짓는다면 태평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했으나
조정대신이였던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명당 길지에 속한다고 하였다.
결과는 실세가였던 정도전의 지론대로 되었으나 인왕산을 주산으로하여 궁궐을 동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의견대로 건축될 경우, 장자(長子) 왕위계승이 어렵고 120년이 지나기 전에 변란이 발생하며 그 후로도 재난이 속발할것이라면서 반론을 재기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유학파 대신들의 주청에 동조하여 경복궁을 세우니 그곳은 북한산(일명 삼각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며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앞쪽의 남산과 관악산을 각각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외청룡은 동대문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내청룡은 정독독서실 자리, 외백호는 신촌 뒤쪽의 모악(母岳), 내백호는 인왕산으로 삼았고(도면 서울 면산도 참조) 청계천을 명당수로 삼았다. 궁궐의 방향을 앉히는데 갑론을박했던 당시 정도 작업 참여대신, 서운관의 지관들이었지만 현재 우리의 수도 서울인 한양이 도읍지로서 명당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손색이 없어 태조는 마침내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뒤로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지난 1994년 10월 28일이 한양도읍지 천도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무학대사가 태조에 "중앙의 터가 넓고 평탄하며 주위 사방의 산세도 빼어나므로 명당 도읍지가 될만하다"고 했던 답산 소감은 술수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려진 풍수학의 현재 위상 무계획적으로 무식하게 개발되어진 서울의 산과 물에 대해 새삼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