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이론

음택풍수의 명당

최고관리자 0 4,222 2016.11.28 15:00

제3장   풍수지리의 3대 분류와 명당
 
 제1절 음택풍수의 명당
 
 1.고종의 조부 남연군(南延君) 묘(墓)
 
 (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삼가리에 있는 남연군 묘는 이조말엽에 유명한 명당사건이였다.  즉,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大院君)은 비극의 세자인 사도세자의 셋째부인 숙비 임시 사이에 태어난 은신군(恩信君)의 손자가 남연군이요 증손자가 대원군이다.
 (2) 흥선대원군의 야심
 안동김씨(安세東도金정氏치)의 60년간 세도정치 아래에서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이하응은 당대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하에서 풍수가(風水家) 정만인(鄭萬仁)에게 12년간 풍수지리를 배운후 장차 앞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차령산맥 중에서도 명당이 많은 기야산(伽倻山)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산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과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부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시오."
이하응은 그곳에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1822)의 묘를 이장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봉분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야심에 사로잡힌 이하응은 권세를 이용해 1840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蓮川)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그때 상여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상여를 번갈아가며 메면서 옮겼는데, 마지막으로 상여를 멨던 마을은 관천리 주민들이다. 이하응은 장사가 끝난 뒤  그마을 사람들에게 상여를 선물로 주었다. 이 상여는 오랫동안 마을의 상여로 쓰이다가 1974년 중요 민속자료 31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각(閣) 속에 모셔져 있다.
대원군은 12세에 모친을, 17세에는 부친을 여의고 기인 행세를 하며 지내던 대원군 이하응은 12세밖에 안 된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1863년 고종(高宗)으로 등극시켰다.  그러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등을 밀사로 파견한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인 고종이 물러나고 이어 손자인 순종(純宗)이 황제로 등극하니, 아들과 손자가 2대에 걸쳐 황제에 오른 셈이다.
천하의 명당으로 묘를 이장한 덕분에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권력을 한손에 쥐고 개혁을 주도했지만, 열강들의 통상 압력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라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긴박한 상황에서 이 묘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능묘 도굴 사건'으로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되었다.
1868년 4월 21일 밤, 오페르트는 기선 차이나(China)호를 빌려 타고 상하이를 출발해 아산만에 도착했다. 이 배에는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 8명과 말레이시아인,   중국 선원 그리고 몇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몰래 남연군 묘에 도착해 묘를 도굴했다. 그러나 묘가 견고하고, 썰물 시간에 쫓겨 그들은 도굴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묘 속에 부장된 유품을 도굴해 그것을 미끼로 천주교 신앙과 통상 약속을 얻어내려는 오페르트의 얕은 수작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조상의 묘를 중히 여기는 조선에서 분묘를 도굴하는 행위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권력을 한손에 장악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나아가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의 묘/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라 하여 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을 모셨다
 
'왕손을 낳게 하는 절터'
옛날 이곳은 예산을 다스리던 관아가 있던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한 서산 당진 예산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군영(軍營)도 있었다.
덕산에서 가야산 쪽으로 가면 덕산면 상가리가 나오는데 이마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던  상여를 보관한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땅 이름이 아닐까 추측된다. 좁은 도로로 들어가면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남연군의 묘비가 묘 아래쪽에 서 있다.
근처에 보덕사(報德寺)가 있는데 이 절은 수덕사의 말사로 서원산(書院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1871년 고종이 가야사를 승계하여 세웠다. 가야사에는 금탑(金塔)이라 불리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는데, 사면에 감실을 두고 부처님을 봉안했던 빼어난 탑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 절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의해 대원군이 절을 불태우고 부친의 묘를 쓰자 그후 왕에 오른 고종이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새로 절을 짓고 이름을 보덕    사라 한 것이다.
묘는 높은 구릉 위에 있고 아래에 서 있는 묘비에 有明朝鮮國顯祿大夫南延君 兼五衛  都摠府都摠官 贈謚榮僖公之墓 郡夫人驪興閔氏府左(유명조선국현록대부남연군 겸오위도총 부도총관 증시영희공지묘 군부인려흥민씨부좌)라는 명문이 오석의 비신에 새겨져 있다.
묘로 오르는 계단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고 잡초가 나 있다.
묘에서 바라보면 덕산을 비롯한 삽교, 예산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고 동남향으로 탁 트여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이곳의 형승에 대한 풍수가의 이견은 다음과 같다.
소백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속리산을 거쳐 차령, 청양의 백월산, 홍성의 대월산으로 이어져 가야산이 만들어지고, 이어 그 줄기는 북쪽으로 뻗다가 몸을 돌려 가야산을 다시 돌아보는 가운데 한 맥이 서쪽(西辛)으로부터내려와 만든 명당이라 한다.
방향은 남동향(亥坐巳向)이고 물줄기는 동쪽에서 나와 남동쪽으로 막히니(卯]得辰破),  혈(穴)로 들어오는 용(龍:석문봉)의 좌우에는 가야봉이 천을(天乙)이 되고 옥양봉이 태을(太乙)이 되어 각각 혈을 호위하고 있다. 또한 오른쪽의 백호(白虎)는 금성과 목성의 산들이 연이어 뻗어 혈을 감싸고 수구를 막고 있는 반면, 청룡(靑龍)쪽은 목성의 산들이 서로 이어져 역시 수구를 막아주고 있다.
이곳의 형승은 한마디로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앞산들은 마치 만조백관이 절하는 모양 같으니 왕(王)의 자리이다. 그러나 몽등이(杖) 같은 왼쪽 청룡이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어 후손에게 피를 부르는 우환(血光之患)이 있을 것이고, 백호 쪽은 각각의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니 부인들의 주장이 드셀 것이다.  구릉 위에 높이 모신 묘는 낮은 호석을 둥글게 두르고 그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를 두었    다. 묘비의 비문은 묘 아래의 묘비와 동일하고 장명등은 몹시 화려하다. 마치 이천의  김병기 묘에 설치된 장명등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서양 궁궐의 지붕 모양을 본뜬 옥개석이 특이하고 화창을 둥글게 사방에 내었다.
  그러나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망주석이다. 보통의 망주석은 아래 부분을 땅에 묻는데,  이 망주석은 간주석을 갖춘 기단 위에 높이 서 있으며 모양과 위용이 대단하다. 군데군데 바위가 땅 속에 묻혀 있어 옛 절의 흔적을 보여주며, 석물은 이끼가 끼어 고태스럽다.
 
2. 명태조 할아버지의 명당
 
강원도 춘천시 의암호가 내려다 보이는 우둔평야에 우뚝솟은 나지막한 산봉우리, 춘천    시민의 산책공원 우두산(牛頭山), 말 그대로 소머리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명당길지의  충렬탑 북쪽 주산에서 45도 건해(乾亥)에서 우선 변화하여 경유(庚酉) 입수하여 힘찬 혈(穴)을 만들고 왼쪽에는 소양강이 내려다 보이고 오른쪽은 의암호가 내려다 보인다.    예전에 소양강이 돌아 흘러 하회(河回)하여 완만 보호사 외청룡 외백호의 2중 보호사로  형성된 명당이다. 우선한 아래는 우드 평양가 작은 섬과 얕은 굴곡이 뻗어 있어 천군만마를 호령하고 군신의 조례를 받는 형국이다. 안산은 봉의산으로 수려한 자세로 명당을    향하여 경의로 표하는 자세다.
  그런데 이곳 봉분은 팔백년전에 조성된 묘지인데도 풀한포기 없는 뻘건 황토색에 가까운 규사토로 만인이 밟고 지나가도 한치도 봉분이 무너지지 않고 800년 넘게 깨끗이 보존되고 있으며 공원이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산책 나오고 주산쪽인 자방    에 한국전 용사들의 충렬탑이 우뚝선 탑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고 있는 곳이다. 혈장(穴場)은 유혈인데도 800년이 넘는 적봉분이 한치도 무너지지 않는 특이 봉분이다.
이 자리가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명태조 주원장의 조부묘이다. 즉 명태조 주원장은 한국사람이라는 것이다. 고려 중엽 주원장의 아버지는 대대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가 할아버지가 죽자 아들인 주원장의 아버지가 이곳의 장례지나고 남부여대하여 중국으로 이사가서 아들을 낳은 것이 바로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중국 중원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시킨 황제이다. 이러한 사적지를 우리나라와 관계 없다고 국민들이 방치함에도 또 명당이라 돌보는 이도 없는데 800여년 비바람을 견뎌온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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